[미디어스=권오석 칼럼] 공기업은 원래 국가와 국민이 공동으로 소유한 전략 자산이다. 민간이 선도하기 어렵거나 시장이 실패하는 영역, 에너지·교통·방산·데이터 인프라 같은 기간산업에서 공익을 우선해 위험을 감수하고 장기투자를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졌다. 국민의 세금과 신뢰를 담보로 한다는 점에서, 공기업은 '효율' 못지않게 '정의'와 '투명성'을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공기업 역사는 너무 자주 이 원칙을 배반했다. 정권의 전리품처럼 취급된 낙하산 인사, 밀실에서 좌우된 매각과 인수, 장부의 숫자로만 포장된 ‘성과’가 남긴 뒤늦은 부실. 해외자원개발의 참담한 실패는 아직도 국민의 빚으로 남아 있다. 정치가 경영을 압도하는 순간, 공기업은 공익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지갑으로 전락한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사천 본사 전경 (KAI 제공)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사천 본사 전경 (KAI 제공)

최근 또다시 방산 분야에서 충격적인 의혹이 제기되었다. 민주당 한 의원이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 대해 제기한 자료 폐기·비위 관련 의혹은,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국민을 경악하게 만든다. 이 사안은 단 한 치의 정치 공방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방산은 안보와 직결되는 국가 전략산업이다. 카이 관련 의혹은 철저한 수사와 국정조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만약 위법과 부정이 확인된다면, 관련자 전원에 대해 무관용 원칙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반대로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 또한 투명한 절차로 해명되어야 한다. 핵심은 단 하나, 진실이다.

왜 이런 사태가 반복되는가. 

첫째, 인사 지배다. 사장과 이사진이 전문성과 공익성보다 정치적 충성으로 선임되는 순간, 조직의 나침반은 ‘국민’에서 ‘권력’으로 돌아선다. 

둘째, 거버넌스의 형식화다. 이사회는 독립성과 전문성이 빈약하고, 사장추천위원회는 권력의 의중을 합리화하는 통로로 오해받는다. 

셋째, 공익 없는 거래다. 민영화·매각·대형투자는 공정가치 평가와 이해상충 차단, 공익성 검증이 생명인데, 우리는 너무 자주 ‘속도’와 ‘밀실’에 유혹된다. 

넷째, 사후감사 의존이다. 문제가 터진 뒤에야 국회·감사원이 나서는 구조로는 예방이 불가능하다. 

다섯째, 리스크 관리 부재다. 해외·환율·정치 리스크에 대한 상시 점검과 철수 원칙이 없다 보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에야 손실이 숫자로 드러난다.

낙하산 인사 (연합뉴스)
낙하산 인사 (연합뉴스)

해법은 분명하다. 핵심은 사장 선임부터 바꾸는 것이다. 공기업의 ‘머리’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어떤 제도도 서류 위에서만 번듯할 뿐이다.

첫째, 독립적 사장추천위원회를 상설화하고 외부독립이사를 과반으로 구성해야 한다. 산업·법무·재무·노무·ESG·안보 전문가가 참여해 후보를 공개모집하고, 이해상충·형사·행정 제재 이력, 최근 5년 정치활동 여부를 포함한 Fit & Proper(적격성) 심사를 법제화해야 한다. 최종 후보는 대국민 공개 검증을 거쳐야 하며 이사회 표결과 이의제기 내역은 전면 공개되어야 한다.

 

둘째, 민영화·매각 공익테스트의 법정화다. 거래 전 단계에서 공익성 점검표, 복수의 외부가치평가와 페어니스 오피니언, 이해상충 차단 계획을 의무화하고, 심사위원 구성 원칙과 평가모형을 사전 공개해야 한다. 거래 후에는 성과와 영향, 의사결정 기록을 담은 백서를 반드시 내놓아야 한다.

 

셋째, 증거보전과 실시간 투명공시를 일상화해야 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계약과 용역·자문은 상시 공개하고, 대형 사업에는 문서폐기 모라토리엄과 IT 포렌식을 즉시 가동해야 한다. 내부고발자 보호와 보상은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양심’이 가장 안전한 통로가 되게 하자.

 

넷째, 리스크 거버넌스 표준화다. 해외투자와 방산·에너지 등 고위험 사업에는 사전 타당성–외부검증–파일럿–본투자–철수옵션으로 이어지는 게이팅 프로세스를 의무화하고, 환리스크·정치리스크 스트레스테스트 결과를 분기별로 공개해야 한다.

 

다섯째, 이사회 구조 개편이다. 전문성과 다양성 쿼터를 도입하고, 감사위원의 독립성과 예산을 보장해 이사회가 ‘허수아비’가 아닌 진짜 감시자가 되게 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제2차 핵심규제 합리화 전략회의에서 참석자 발언을 듣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제2차 핵심규제 합리화 전략회의에서 참석자 발언을 듣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연합뉴스)

공기업은 단지 일자리를 만드는 고용기관도, 성과급을 위해 숫자를 분칠하는 자회사도 아니다. 공기업은 국민 주권의 물적 기반이다. 한 번의 잘못된 인사, 한 번의 밀실 거래, 한 번의 부실 투자가 국민의 신뢰와 세금을 얼마나 깊이 파괴하는지 우리는 이미 뼈아프게 경험했다. 이제는 다르게 해야 한다. 권력이 공기업을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공기업을 지배하는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

카이 의혹은 그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진실을 가리고 책임을 묻는 일은 특정 진영의 승패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품격과 산업의 미래, 그리고 공기업을 다시 국민의 품으로 돌려놓는 시작이다. 공기업을 바꾸는 것은 곧 대한민국의 체질을 바꾸는 일이다. 우리는 그 대업을 미룰 만큼 한가하지 않다. 지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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