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권오석 칼럼]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이 행복할 수 있는 질서를 구축하며, 공공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있다. 그 토대에는 언제나 ‘조세(租稅)’라는 말 없는 계약이 있다. 국가는 조세를 통해 안보, 복지, 교육, 사회안전망 등 핵심 기능을 수행하며, 국민은 그 재원을 제공함으로써 주권의 일익을 담당한다.

조세제도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진화 그 자체였다. 고대에는 왕과 귀족의 사치와 전쟁을 위한 세금이 주였고,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치며 자본가 계급의 등장과 함께 세금은 점차 소득과 자산의 재분배 수단으로 확장되었다. 20세기 중반 유럽 국가들이 보여준 ‘고부담-고복지’ 모델은 조세의 정당성과 국가의 신뢰를 구축한 대표적 사례다.

국세수입(PG) (연합뉴스)
국세수입(PG) (연합뉴스)

반면, 한국의 조세제도는 빠른 경제성장 속에서 ‘성장 중심’의 과세체계로 설계되어 왔다. 소득이 불균등하게 축적되고, 상속세·법인세 등의 실효세율은 낮은 반면, 중산층 이하가 체감하는 조세부담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특히 자산소득에 대한 과세는 부동산 중심의 자산 편중 구조 속에서 정책 신뢰를 흔들고 있다. 조세는 '공정해야 한다'는 국민적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세제도는 국민의 행복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OECD 국가들의 통계를 살펴보면 명확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법인세율이 24%, 소득세 최고세율이 약 45.6%이며, 사회복지지출은 GDP 대비 12%에 불과하다. 반면, 스웨덴·노르웨이·프랑스 등은 법인세율은 비슷하거나 낮지만 사회복지 지출이 GDP의 25~31% 수준이고, 이들 국가는 모두 국민 행복지수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세율 자체보다는 세금의 ‘용도’가 국민의 삶의 질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다.

실제로 분석 결과에 따르면 조세지출의 사회적 효율성이 높을수록 국민 행복지수가 상승하며, 조세 저항은 줄어든다. 법인세나 소득세율이 높더라도 그 세금이 교육, 의료, 주거, 육아 등에 투명하고 공정하게 사용된다는 믿음이 있다면 국민은 이를 감내한다. 즉, 조세의 정당성은 ‘세금을 얼마나 거두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에 있다.

출생아 수 하락, 고령화 상승(PG) (연합뉴스)
출생아 수 하락, 고령화 상승(PG) (연합뉴스)

이제 대한민국은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저출생·고령화·복지 수요 증대라는 구조적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국가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라도 조세제도는 단순한 재정수단을 넘어 사회계약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균형점을 모색해야 한다.

첫째, 누진세의 실효성을 확보하되 중산층 이하에 대한 조세 부담은 완화해야 한다. 상위 1%의 자산 및 자본소득에 대해서는 보다 정교한 과세 도구를 마련해야 하며, 노동소득에 대한 과세는 일자리 창출 및 소비 진작과 연계할 필요가 있다.

 

둘째, 세제와 복지의 연동성을 강화해야 한다. 청년 주거비 세액공제, 육아비 공제, 지역교육비 지원 등 ‘행복 연계 세제’를 통해 조세가 체감되는 정책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셋째, 조세행정의 신뢰 회복이 필요하다. 투명한 세입·세출 공개, 조세지출의 효과 측정, 납세자 권리헌장 강화 등으로 국민이 세금의 사용처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세계의 모범 사례를 보면 미국은 기업 자산과 세금 회피를 억제하기 위해 글로벌 최저 법인세 기준(15%) 도입에 동참하고 있으며, 핀란드와 네덜란드는 조세와 복지를 연계한 사회적 투자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일본은 상속세를 활용해 자산 재분배를 강화하는 대신 고령자 복지를 직접 연계한다.

계층간 사다리 붕괴 (PG) (연합뉴스)
계층간 사다리 붕괴 (PG) (연합뉴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조세철학은 ‘함께 잘 사는 사회’의 재정 설계다.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란 세금을 성실히 내고,그 재원이 사회적 약자와 다음 세대를 위해 쓰일 수 있도록 응원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제 한국의 K-민주주의는 정치나 투표를 넘어 재정과 조세의 민주화로 확장되어야 한다. 국민의 동의 없는 증세는 갈등을 낳지만, 국민의 신뢰와 합의 속에서 이루어진 조세개혁은 국민행복과 국가경쟁력을 동시에 키운다.

조세는 국민의 부담이 아니라,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투자이자 공동체의 미래를 여는 약속이다.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이 ‘공정하고 따뜻한 조세국가’로 다시 설계되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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