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담이 칼럼] 집 근처에는 작은 도서관이 하나 있다. 집에서 천 보 정도 걸으면 닿는 거리, 가까운 이웃처럼 늘 거기 있어줄 것 같던 도서관이 5월 한 달간 내부 공사로 문을 닫았다. 매일 아침처럼 그 길을 걷다가, 습관처럼 도서관 앞에 멈춰 섰다. 유리문 너머 어두운 내부를 들여다보는데 문득 떠오른 얼굴들이 있었다.
도서관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나타나던 사람들. 어깨에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텀블러를 들고 있었다. 종합자료실 문이 열리면, 자리를 잡고 조용히 책을 펼치던 이들이었다. 내일의 자신을 위해 묵묵히 오늘을 견뎌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0대의 청년부터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까지, 연령도 목적도 다양했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도 있었고, 중간고사를 앞둔 고등학생도 있었고, 정갈한 손놀림으로 신문을 넘기던 어르신도 있었다.

그들이 사라진 5월, 그들은 어디서 책을 읽고 신문을 읽으며 내일을 꿈꾸고 있을까. 나는 발길을 돌려 도서관 뒤편 언덕길을 천천히 걸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게 부서졌다. 갑자기 20대의 내가 떠올랐다.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도서관을 다니던 때였다. 많은 날을 종합자료실에서 보냈다. 막연하게라도,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었다. 도서관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장소였다. 새벽에 눈을 뜨면 이른 아침을 먹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서가와 가까운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필요한 소설책을 찾아 읽기 위해서였다.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소설 찾아 읽던 때였다. 내가 쓰려고 하는 소설과 비슷한 구성으로 짜인 소설을 찾아 있으며 읽으며 구성과 문장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서가를 맴돌며 같은 페이지를 몇 번씩 되풀이해 읽기도 했다.

열심히 읽고, 한 줄 한 줄 공들여 문장을 직조하고 문장을 쌓아 소설을 지었다. 고되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소설을 쓰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밖이 어둑해지는 줄도 모르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으면 미화원이 대걸레로 발등을 툭툭 쳤다. "문 닫을 시간이에요." 읽던 책을 정리해 책꽂이에 꽂고 가방을 정리해 도서관을 나서면 하늘의 별이 유달리 반짝였다.
돌이켜보면, 도서관은 내게 단지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내일의 나를 조용히 연습하던 곳이었다. 말보다 행동으로, 계획보다 습관으로 미래를 꿈꾸던 자리였다. 잘 쓰인 문장을 필사하고, 낯선 단어를 노트에 적고, 나보다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누군가의 등 너머를 바라보며 나는 자랐다.
그 시간은 목표에 가까워지기 위한 훈련이자, 실패를 견디는 연습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읽고 써도 마음에 드는 문장이 단 한 줄도 안 나올 때가 많았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풀이 죽어 도서관을 나왔다. 밖으로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터벅터벅 걷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온통 쓰다 만 문장들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다음 날이 되면 나는 또다시 도서관의 문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어제 도서관에서 보았던 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날이 반복되는 오늘이지만 맞은편 자리에 앉은 사람의 필기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손끝, 물을 마시는 조심스러운 움직임, 그런 사소한 소리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다잡게 했다.
누군가와 말을 나누지 않아도, ‘함께 견디는 시간’만으로도 위로받곤 했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의 고요한 집중이 나를 붙잡아 주었다. 지치고 흔들릴 때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말 없는 위로였다. 그렇게 나도 조금씩 내일을 향해 밀려가듯 걸어갔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어제와 다른 나로.
누군가에게는 책 읽고 생각하기 좋은 힐링 공간이었을 그곳이, 나에게는 매일같이 조용한 전장이었다. 쓰러져도 누구 하나 일으켜주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미완성의 나를 견뎌내는 동안 끊임없이 흔들렸지만, 절대 무너지진 않았다. 조용한 도서관 안에서 나는 수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전장에 나 혼자만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와 있다. 고맙게도.
김담이, 소설가이며 동화작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30회 눈높이아동문학대전 아동문학 부문 대상 수상. 2023년 12월 첫 번째 장편동화 『올해의 5학년』 출간. 2024년 11월, 소설집 『경수주의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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