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전규찬 칼럼] 데리다는 앞서 떠나보낸 지인들을 위해 꾸준히 애도의 작업을 했습니다. 우정을 정치적인 걸로 파악한 그는 사랑은 생존 가능성으로부터 시작하며 생존은 애도의 다른 말에 해당한다고 써놓습니다. 지난 화요일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 짧은 애도의 글을 쓰면서, 나는 살아남아 있는 자들의 죽은 이에 대한 뒤늦은 사랑의 윤리로 이 말을 풀이해 봅니다. 미디어 역사학, 비판 정치경제학의 거장 로버트 맥체스니 교수가 지난주 화요일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에서 비판언론학과 미디어운동이라는 민주적 전통을 지켜가는 여러 동료들과 함께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남은 그의 가족들에게 깊은 사랑을 표합니다.

그를 어떻게 소개할까요? 제국 핵심부에서 강고한 당파성을 견지하며 국가와 자본, 매체의 권력동맹에 집요히 맞서온 맥체스니 교수입니다. 그는 미디어 선전기술과 자본국가의 지배전략을 일관된 담론과 지성으로 비판해 온 좌파 언론학자입니다. 대학과 학계에서 주류 제도화에 맞서 고집스레 비판 언론학을 가르쳐 온 그는, 미국 위스콘신과 일리노이 대학을 오가며, 디지털 감시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위험, 글로벌 민주주의와 저널리즘의 위기에 관해 많은 저작과 논문을 내놓을 것입니다. 운동적 실천도 결코 게을리하지 않은 그입니다. <프리프레스 Free Press>라는 조직을 만들어 오랫동안 전미 언론개혁운동을 주도합니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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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한물간 마르크스주의 미디어 정치경제학자로, 오래된 비판적 언론학자로, 강단의 좌파 미디어 역사학자로 설명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그의 학술과 정치적 사유, 사회적 글쓰기는 매우 현실적이고 폭넓습니다. 그 경계는 언론학의 반경을 한참 뛰어 넘어있습니다. 내놓은 책 제목들만 봐도 잘 알 수 있어요. 돈과 미디어 선거 복합체가 어떻게 미국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 폭로한 <달러지배체제 Dollarocracy>를 한번 봐요. 금용자본주의가 미국은 물론 중국 등 전 세계에 걸쳐 경제 위기와 격변을 낳고 있는지를 짚은 <끝없는 위기 Endless Crisis>는 또 어떻고요.

일자리 없는 경제와 시민 없는 민주주의에 대항해 싸울 우리의 시간을 제시한 <시민들은 준비가 되어야 한다 Peopel Get Ready>도 빠트릴 수 없는 명저입니다. 이런 예리한 지적, 정치적, 학술적 활동을 위해 그는 비판적 사회학자, 진보적 현역 저널리스트들과 활발하게 협업합니다. 그의 이런 맹렬하고 인정받은 정치력이 미국을 대표하는 사회주의 월간지 <Monthly Reveiw>의 공동편집장 역으로 이끕니다. 세계적으로 존경 받는 노암 촘스키 교수와의 사상적 교류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 탁월한 학자이자 성실한 시민이며 책임감 높은 ‘정치인’이었던 친구의 갑작스런 별리가 너무나 슬픕니다.

‘디지털 디스커넥트’ 표지 이미지 (전규찬 옮김/ 삼천리)
‘디지털 디스커넥트’ 표지 이미지 (전규찬 옮김/ 삼천리)

나는 도래한 디지털 혁명을 희망의 관점이 아닌 반대의 불길한 시선에서 바라본 그의 <Digtial Disconnet 디지털 디스커넥트>를 꽤 전에 국내에 번역해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맥체스니 교수의 또 다른 흥미로운 저작 <The Death and Life of American Journalism 미국 저널리즘의 죽음과 삶> 번역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영세한 한 출판사의 기막힌 상황으로 출간이 막혀 내 컴퓨터에 잠겨버린 이 두 번째 저작에서 그는 진보적, 민주적, 대항적 시민 저널리즘을 되살리기 위한 혁명적 방책으로서 바우처 제도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한국 저널리즘 운동에도 함의가 매우 큰 아이디입니다.

그래서 꼭 발간해야 할 책인데, 아무튼 이런 공식적인 경우를 빼놓고, 나는 그를 다른 친구들도 그러듯 그냥 ‘밥’이라 부릅니다. 20대 중반 그의 첫 박사학위 학생지도를 받을 때부터입니다. 아, 둘 다 한참 젊었던 그 시절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와 나 사이는 충돌하는 우정 혹은 애증의 관계인 게 맞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백인 마르크스 선생과 예민한 제3세계 출신 유색인 운동권 유학생은 어울리듯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본(주의)을 말할 때, 나는 문화(주의)를 찾았습니다. 그가 정치경제학비판 강의를 할 때, 포스트콜로니얼 타자·소수자는 그를 환대하는 문화연구자의 강의실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계급론에 맞서 인종주의론을 주창하는 학생이 맘에 들 리 없습니다. 나도 그의 외고집이 짜증나고 불편했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자, 바쁘다는 핑계로, 한참 동안 그와의 연락을 멀리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길을 자꾸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여러 채널에 출연하고 온갖 지면에 비평 잡글을 씁니다. 똑같이 사회운동 판, 미디어문화 운동장에 깊숙이 발을 들입니다. 덕분에 빨간 줄도 그이고, 소위 블랙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립니다. 운동장에서는 늘 청개구리로 취급되고, 학계 안에서는 삐딱한 존재로 통합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불온한 스승이 이 학교 저 학교에서 그러하듯, 괴팍한 제자도 자주 혼자입니다.

외로웠습니다. 힘이 듭니다. 차라리 먼 데 있는 친구가, 낯선 곳의 동료가 필요했습니다. 고집쟁이 외골수 인생을 고집하는 선생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밥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헤이 밥, 안녕, 전이야. 그렇게 해서 서로 응원하고 양국의 현안을 상의하는, 도움 될 것들에 대해 같이 협력하는 연구자 활동가 동무가 됩니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한국에서 운동하지만, 나이가 꽤 든 후 두 사람은 좀 더 넓어진 마음씨와 보다 성숙해진 안목으로 체제 비판, 세계 변화를 위한 연대의 힘을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히 동지로서 깊은 신뢰와 애정까지 느낄 사이가 된 거죠.

몇 해 전, 첫 번째로 번역한 책을 들고 그의 매디슨 집을 간만에 찾았습니다. 젊었을 때의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이 들어 그러나 보다 했습니다. 운동과 연구, 학교 일로 힘드나 싶었죠. 선물로 준 그의 저작들 중 한 권을 또 번역하면 그때 다시 보자 했습니다. 그런데 출판 못한 번역본은 원고상태로 내 컴퓨터에 잠기고, 그러다가 몇 해가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일이 안 풀려 화가 난 나는 이후 밥에게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제자가 번역한 두 번째 한국어 책자를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이죠. 그리고 오늘 그의 부고를 듣게 됩니다.

3월 16일 서울 종로구 동십자각 앞에서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주최한 탄핵 촉구 집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3월 16일 서울 종로구 동십자각 앞에서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주최한 탄핵 촉구 집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비보입니다. 저곳에서 트럼프 우익 파시즘이 다시 횡행하고, 이곳에서는 계엄이 터지고 내란이 펼쳐지는 난리도 아닌 시간이라, 더욱 날벼락 같은 소식입니다. 민주주의 퇴행의 시간, 사회 민주주의 진보의 미래를 위해 국경을 가로질러 연대할 민주주의자 한 명이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그를 기억할까요? 컴퓨터 공간에 고여있는, 우리말로 채 출간되지 못한 내 친구 밥의 <미국 저널리즘의 삶과 죽음>을 꺼내 읽습니다. 서문 말미에 그는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놀랍게도 지금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장 같습니다. 그걸 읽는 걸로 잠시 기억의 공간, 짧은 애도의 시간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죽은 이의 산 자에 대한 사랑의 번역문입니다.

현 위기 민주주의자의 목표는 오래되고 낡은 뉴스 미디어 기업이라는 선박을 대충 수리해 폭풍우 속으로 깊이 항해해 들어가는 게 아니어야 한다. 헌법체계와 대의민주주의를 극적으로 고양할, 전혀 새로운 양질의 저널리즘을 새로 만들어내는 게 우리 목표가 되어야 한다.

 

비상한 오늘의 시간이다. 위기는 특별한 해결책을 요구한다. 조금 전까지 꺼내지도 못할 아이디어를 우리는 이제 논쟁의 한복판에 과감해 내놓을 것이다. 현상 유지의 구태의연하고 관습화된 지혜는 부도가 나고 신뢰를 잃었다. 우리가 지금 아무 것도 안 하면, 삶은 더욱 어려워질 게 명백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당장 행동에 나선다면, 오늘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진보의 순간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운명을 손에 쥔 그런 드문 역사적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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