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흑백요리사>를 보면서 한국형 서바이벌 방송, 그러니까 K-서바이벌 방송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서바이벌 경연 방송은 K-콘텐츠의 메인 장르로 자리 잡았다. 오래 전 미국에서 수입한 포맷이지만, 변용과 진화를 거쳐 독자적 영역을 확보한 것 같다.
해외 서바이벌 방송과 구분되는 한국 서바이벌 방송의 특징은 무엇일까. ‘경연의 주변화’라고 한 마디로 요약된다. 특정한 분야에 대한 참가자들의 역량을 겨루기 위한 방송이지만, 경연 장면이 늘 방송의 중심을 이루는 건 아니다. 경연보다는 룰과 편집을 통해 엮는 서사와 캐릭터, 참가자들의 갈등과 케미스트리 같은 드라마적 요소들이 방송을 끌고 갈 때가 많고, 진정한 셀링 포인트로 장치 돼 있다. 이걸 집약하는 대명사가 한때 한국 서바이벌 방송을 주무르던 방송사 엠넷의 ‘악마의 편집’이다.

2021년 신드롬을 일으킨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보자. 역시 스트릿 댄스를 소재로 한 방송으로는 중국의 <스트릿 댄스 오브 차이나>가 유명하다. <스댄차>의 룰과 연출은 싱겁다. 이런 저런 장치를 꾸며 놓았지만, 드라마적 요소보다 경연적 요소가 우세하고 세계적 댄서들이 벌이는 댄스 배틀이 가장 큰 콘텐츠다. <스우파>는 출연자들의 사연을 소재로 드라마를 엮고, 경쟁 과열을 조장하는 룰을 심고, 스트릿 댄스 자체가 아닌 ‘걸크러시’라는 트렌드를 전면에 걸고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런 종류의 신드롬은 두 개의 도화선을 타고 점화되는데, 하나는 화제성이고 하나는 팬덤이다. K-서바이벌은 시청자를 과몰입에 빠트리고 출연자를 서포트하며 경연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는 방송 이후까지 따라오는 팬덤을 얻는 과정이며 콘서트와 굿즈 판매 같은 후속 사업이 연계되고 있다.
<피지컬 100>을 필두로 제작된 넷플릭스 버전의 서바이벌 방송은 K-서바이벌의 생태계에서 벗어나 있다. 사전 제작 시스템을 취해 출연자와 팬덤의 이인삼각 경주가 불가능하다. 시청자들 반응을 겨냥하거나 반영하는 연출도 한계가 있어 연출의 초점은 방송 내부로 응집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넷플릭스 서바이벌은 사전 제작을 통해 정돈된 만듦새와 웅장한 스케일은 물론 경연에 좀 더 치중한 연출로 호평 받았다. <스우파> 시리즈를 넷플릭스에서 만든다면, 같은 게시물이 관련 커뮤니티에 올라 와 공감을 산 적도 있다. 기존 서바이벌의 자극성에 중독된 한편 피로감을 느끼지만 대체재가 없어 소비하는 시청자들 심리를 반영하는 에피소드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역시 기존의 K-서바이벌과 다른 길을 모색한 것이 엿보인다. 쟁쟁한 요리사 100명이 거대 세트장에서 요리를 하는 규모감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계급이란 테마를 취하면서도 출연자들 서열을 나누는 방식으로는 활용하지 않았다. 엠넷 <퀸덤 퍼즐> 제작진이 출연자들을 1군부터 4군까지 나누고 승강제를 취하는 가학적인 룰로 케이팝 팬덤의 신분제적 문화를 끌고와 합리화하던 모습과 다르다. 출연자들의 케미스트리 같은 요소도 그다지 연출되지 않았는데, 한정된 분량 속에 집중과 가지치기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대신 심사를 맡은 안성재의 어록 같은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는 그의 캐릭터를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경연 심사 상황에서 그의 전문성이 녹아들어 간 멘트이기도 하다. 경연의 본질적 요소가 시청자들이 소비하는 ‘화제성’으로 삼투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흑백요리사>는 K-서바이벌의 관성을 벗어던지지는 못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선 기존 방송들이 물려준 인습을 적극적으로 인수해 삽입해 놓았다. 출연자들의 갈등과 상호 견제를 포착하기 위한 선정적 장치들이다. 경연의 긴장감 대신 각종 논란과 인간관계에 몰입하도록 유도한다. 12회 분량 방송에서 팀 미션을 두 번이나 반복하며 개개인의 기량을 보여줄 분량이 삭감됐다. 여론의 사냥감이 될 ‘빌런’을 만들어서 바치는 연출, ‘악마의 편집’의 흔적 역시 꼬리뼈처럼 돋아있다. 두 번째 팀 미션에서 갑자기 통보된 방출 투표는 그런 의도가 노골화된 장치로서 출연자 사이 따돌림을 조장하고 수모를 가하는 질 나쁜 연출이었다. 이런 연출 노선에 의해 한식 명인과 일식 명장이 광어 잡고 미역이나 볶다가 집에 가 버리는 허무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상의 문제는 시청자들 사이에서 익히 논란이 되고 비판 받았다. 방송 제작자들이 이해하는 흥행 포인트와 시청자들의 실제 수요에 괴리가 존재하는 상황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흑백요리사>는 넷플릭스의 새로운 생태계와 어울리지 않는 구태의연함에 머물고 있지만, 그것을 단순히 한계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방송 안에서 만든 논란을 방송 바깥의 논란으로 발전시켜 방송에 대한 부정적 피드백까지 화제성의 재료로 삼는다. 이슈 과잉 사회에서 생명력이 시들지 않는 전가의 보도이며, 이런 방식의 연출에 익숙하지 않은 해외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논란을 바다 너머로 퍼트린다. 이 ‘어그로’의 세계관이야말로 K-서바이벌의 유전자이자 경쟁력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이 사실을 자각하고 어디까지 활용할 것인지, 혹은 그 인습을 탈피하는 진화에 도전할 것인지, <흑백요리사>의 성공이 넷플릭스 코리아에 남기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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