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한국 언론의 성폭력 보도는 피해자의 고발·송사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사건 경위에 언론의 관심이 쏠릴 경우 가해자의 서사가 부각되고 2차 피해 우려가 커져, 구조적 성폭력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은 성폭력 피해사실과 피해자의 신원을 드러내는 언론보도가 피해자의 삶을 보장하는 방식인지, 언론사 내부 구조와 취재관행이 성인지 감수성에 부합하는지를 논의하는 게 성평등 저널리즘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방송화면 갈무리)

최고의 미투이자 최악의 미투

15일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성평등위원회가 '젠더 이슈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주제로 강연을 개최했다. 발제자인 권김현영 소장은 과거 한국 언론이 참사에 가까운 성범죄 보도를 했으며 이에 따라 다수의 보도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졌지만 '중립'을 넘어 '사회정의'를 실천한 보도가 이뤄졌는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2012년 '나주 어린이 성폭력 사건' 보도로 2차 피해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면서 각종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이 제정됐지만 속보·상업주의 경쟁으로 가해 행위를 자세히 묘사하는 방식의 보도·대담은 여전했다. 2012년 나주 사건 당시 조선일보가 가해자의 얼굴 사진을 잘못 내보내는 대형 오보가 발생했다. SBS·채널A·경향신문 등 언론은 뻗치기식 보도를 통해 피해자의 주변을 상세하게 전했다.

이후 ▲경향신문 '성범죄 보도 준칙' (2012년) ▲한국기자협회·국가인권위 '성폭력 범죄 보고 세부 권고 기준'(2012) ▲한국기자협회·여성가족부 '성폭력사건 보도수첩'(2014) ▲한국기자협회·여성가족부 '성폭력 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2018) 등이 제정됐지만 논점 없이 성폭력 사건을 가십거리 삼는 문제적인 보도·방송이 이어졌다.

권김 소장은 "2012년 이후 많은 기자들이 가이드라인 정도는 알게 되었지만, 실제 현장에서의 문제는 달랐다"며 "FGI(Focus Group Interview)를 해보니 기자들은 스트레이트 경쟁이 있기 때문에 보도를 먼저하고. 후속보도에서 문제의식을 다시 보도하는 방식이 하나의 규칙이 됐다고 했다. 보도 성격이 달라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하더라"라고 전했다.

이어 권김 소장은 "방송기자들은 성범죄 보도에 있어 데스크가 이전에 요구하지 않았던 자세한 상황 묘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며 CCTV 확보나 재연·사진 사용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며 "2013~2017년까지 성범죄 보도는 일정 정도 상업주의화·선정주의화 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성평등위원회 강연자료 '성평등 저널리즘부터 성평등 조직문화까지' 갈무리

권김 소장은 피해자가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뉴스룸에 모습을 드러낸 피해자들의 고발이 성폭력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데 기여한 건 사실이지만, 이후 성폭력 고발은 피해자가 미디어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거나 세세한 정보를 나열하지 않으면 믿기 어렵다는 압력을 받았다는 지적이다.

권김 소장은 스웨덴 미투운동 활동가 수잔나 딜버가 한국의 미투운동을 '최고의 미투이자 최악의 미투'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스웨덴의 미투 운동은 여배우 457명의 피해사례가 한꺼번에 폭로되면서 시작됐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유명인의 성범죄만 주목받는 것을 피하고, 개별 사건보다 구조적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권김 소장은 영국 전국언론노련(NUJ)의 인종문제 보도지침을 소개했다. 해당 지침은 인종을 밝혀야 할 경우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정확하게 확인 후 밝힐 것 ▲백인일 경우에도 인종을 밝혔을 것인지 자문할 것 ▲인종문제를 선정적으로 다루지 말 것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인종차별단체를 취재할 경우에 ▲이들 단체의 반사회적 시각은 반드시 사회에 공개되어 비판되어야 한다 ▲단체의 행동에 대한 기사·사진·영화·보고서 등은 선정적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단체의 주장과 신념에 대한 허구성과 반사회적행위 등을 보여주는 자료를 취재·보도하라 등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권김 소장은 "중요한 건 중립이 아니라 사회정의라는 것이다. 차별과 혐오의 집중적 대상이 되는 집단에 대한 보도는 중립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편향을 지속시키는 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며 "객관적 보도를 표방해 '쉬 세드 히 세드'(she said he said) 방식으로 접근하는 저널리즘은 무책임하다"고 지적했다.

데스크 교육, 평등 저널리즘의 핵심

권김 소장은 "성평등 저널리즘은 성평등한 조직문화 없이 가능하지 않다"면서 데스크 등 언론사 내 의사결정권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을 강조했다. 권김 소장은 "FGI 조사를 보면 권위주의적 조직문화가 강력한 곳도 있고, 굉장히 평등한 조직도 있어 언론사마다 상황이 너무 달랐다"면서 "한 가지 확실한 공통점은 젠더 문제와 관련해서는 새로 들어온 기자들의 성평등 의식이 그 전 세대보다 높다는 것이다. 데스크들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게 젠더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대표적 사례는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 씨 출소 보도와 관련된 KBS의 결정이다. 지난 2020년 12월 조 씨 만기 출소 당시 KBS 평기자들은 뻗치기 보도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사내 성평등센터를 통해 데스크들에 대한 성평등 교육이 이뤄졌으며 KBS는 뻗치기 보도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권김 소장은 "성범죄자의 목적 중 하나가 언론의 조명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조두순 피해자 가족들은 언론보도의 등살 때문에 주민 민원을 책임져야 했고, 거주지역이 노출되면서 이사를 가게 됐다"며 "언론보도가 범죄자를 주목함으로써 피해자의 피해가 가중된 것이다. KBS 사례는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이 이뤄졌을 때 드라마틱한 효과가 발생한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권김 소장은 성평등 저널리즘을 위한 제작환경으로 ▲임원들이 의지를 보일 것(한겨레 젠더데스크, KBS 성평등센터 등) ▲보직·역할 '유리천장' 개선 ▲젠더 이슈 전문성 강화 ▲성평등 가이드라인 정기·집중·보편교육 실시 등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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