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강남규 칼럼] 한국의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위성정당의 출현은 선거의 양상을 뒤집어 버렸다. 케케묵은 ‘정권심판론’과 ‘적폐청산론’을 명분으로 내걸고 만들어진 두 위성정당은 다시 그것들을 선거 구도로 강화하면서 다섯 가지 중요한 것들을 잡아먹었다.

첫째, 근본적으로 정치개혁을 잡아먹었다. 작년 한 해 치열하게 줄다리기를 하다 마침내 타협되어 통과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 이른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기존 소선거구제의 불합리한 측면을 바꾸겠다는 취지로 제안됐다. 한 정당에 대한 지지율과 실제 의석 수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보완하고, 사표 심리를 극복하여 “다양한 정책과 이념에 기반한 정당의 의회 진출을 촉진(의안 제안이유 인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가 2월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미래통합당 출범식 '2020 국민 앞에 하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물론 통과 과정에서 지나치게 복잡한 수정이 가해진 까닭에, 법안이 정의당 같은 중위권 정당에 유리한 제도로 귀결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법안의 핵심적인 취지는 여전히 ‘양당에 지나치게 유리한’ 선거제도를 뒤집자는 데 있고, 중위권 정당들의 약진이라는 결과는 적어도 법안의 취지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 취지를 정확하게 거스르는 것은 양당의 위성정당 창당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다채로울 것이라고 기대했던 제21대 국회는, 제도의 허점을 노린 위성정당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양당 편향적인 국회가 될 전망이다.

둘째, 정책선거를 잡아먹었다. 정책이 비례정당 등록을 위한 절차 정도로 소비된 것이다. 선거에 참여하는 정당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10대 정책’을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급조된 위성정당들은 이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미래한국당은 미래통합당의 10대 정책을 순서만 바꿔 냈다고 한다.

더불어시민당은 이 과정에서 우스운 꼴이 됐다. 기본소득, 한반도 이웃국가론 등 “여러 소수정당과 논의할 때 기계적으로 취합한 정책들”(더불어시민당 입장문)을 제출했다가 더불어민주당의 당론과 맞지 않아 논란이 된 것이다. 이후 기존 10대 정책을 철회했고, 더불어민주당의 10대 정책과 동일한 내용을 다시 제출했다가, 이 역시 논란이 되자 다시 철회하고 A4 2장 분량의 정책을 제출했다. 위성정당이 ‘정책’을 얼마나 가벼운 태도로 대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셋째, 정당정치를 잡아먹었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책임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다. 정당에는 핵심 지향 및 정체성을 밝히는 강령이 있고, 민주성을 강화하는 당헌·당규가 있다. 정치인 개인은 갈지자로 움직일 수도 있지만, 조직으로서 정당은 제도들을 갖춘 까닭에 종종 입장을 수정할 수는 있어도 큰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정당정치는 유권자들에게 신뢰를 주고 정치적 선택의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책임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을 고려할 때, 정당이 받은 득표율을 전체 의석 수에 반영하는 연동형 선거제도는 인물이 아닌 정당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강화할 때 민주주의가 지속될 수 있다는 취지도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선거가 끝난 뒤 모정당과 합당하거나 ‘셀프제명’을 통해 각자의 당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위성정당 기획은 정당정치가 가진 책임정치의 측면을 우습게 만들고 연동형 선거제도의 취지를 훼손한다.

넷째, 진보정당과 시민운동을 잡아먹었다. 이는 특히 진보진영의 비례연합정당 추진과정에서 두드러졌다. 하승수 변호사를 비롯한 시민사회계 원로들이 비례연합정당을 추진하며 군소 진보정당들의 참여를 요구했는데, 이 과정에서 진보정당들은 크고 작은 내홍을 겪었다. 대표적으로 정의당과 녹색당의 당원들이 연합정당 참여 찬반으로 입장이 갈리며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논쟁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고, 많은 수의 당원들이 당의 결정에 반발하며 탈당하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3월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당대표회의실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비례대표용 연합정당 더불어시민당 신현영 명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권인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원장 등 비례대표 후보자들과 만나 기념촬영 하고 있다.(연합뉴스)

상대적으로 단일한 노선을 유지하던 시민사회계도 비례연합정당 추진에 대한 찬반으로 입장이 나뉘며 갈등의 불씨를 키웠다. 그중에는 하승수 변호사가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선거제도 개혁운동을 펼쳤던 비례민주주의연대도 포함되어 있다. 이 단체는 하승수 변호사가 비례연합정당 플랫폼인 ‘정치개혁연합’을 본격화한 직후 “선거연합정당 창당은 비례민주주의연대 공식입장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정의당‧녹색당‧시민사회계가 참여하는 비례연합정당은 무산됐고, 그 자리에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한 더불어시민당이 들어섰다. 더불어시민당은 최소한의 창당 명분을 증명하고자 비례후보 1번부터 10번까지를 군소정당(기본소득당‧시대전환)와 시민사회계 인사들로 채웠다. 지켜봐야 알 일이지만, 더불어시민당에 참여한 군소정당‧시민사회계와 참여하지 않았거나 못한 군소정당‧시민사회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나뉜 꼴이 되었다.

다섯째, 정치 자체를 잡아먹었다. 위성정당 추진 과정은 그야말로 추태의 연속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위성정당을 만들고 ‘의원 꿔주기’를 자행한 미래통합당의 행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선거제도 개편(안)에 합의하고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 시도와 의원 꿔주기를 강하게 비판했던 더불어민주당이 똑같이 위성정당을 만들고 의원까지 꿔준 것은 추태 그 자체다.

‘공언(公言)’의 무게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신뢰와 일관성이 무기여야 할 정당과 정치인이 한 번 내뱉었던 공언을 대놓고 뒤집었다. 그렇게 말을 뒤집어 만든 위성정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20% 이상의 지지율을 보이며 선전하고 있다. 원칙이 아닌 꼼수가, 일관성이 아닌 말 바꾸기가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전시한 정치는 어디에 다다르게 될까. 이제 정치인과 정당의 말을 누가 믿어줄까.

주변에서 처음으로 투표 기권을 고려하고 있다는 체념적인 말들이 나온다. 이럴 거면 그냥 비례대표제를 없애버리자는 냉소 섞인 말들이 신문지면에 실린다. 당 이름도 구분이 안 되는데 어느새 선거일이 다가왔다며 황당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정치를 잡아먹고 자란 위성정당이 이런 난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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