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등지에서 대북 전단을 풍선에 실어 날려 보내려던 민간단체와 이를 막으려는 주민 및 반대 단체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상황에 대한 27일 신문 사설에서 보이는 언론 지형도는 사람들의 편견과 사뭇 다르다. <미디어스>에서 최근 몇 번이고 지적했듯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와 비슷하거나 더한 수위로 강경하고 <중앙일보>는 합리적 태도를 취하여 진보의 의견에 근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보성향의 <경향신문>과 중도성향의 <한국일보>가 이에 대한 사설을 쓰지 않은 상황에서, 마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한 편이고 <중앙일보>와 <한겨레>가 한 편처럼 보이는 기이한 상황이다.

일단 ‘충돌’의 양상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입장이 드러난다. <조선일보> 사설의 설명은 이렇다. “이 과정에서 경찰을 사이에 두고 장시간 대치가 이어졌고, 반대하는 쪽 사람 일부가 복면을 쓰고 풍선이 실린 트럭에 뛰어올라 풍선을 찢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등은 이날 저녁 김포시 인근 야산으로 이동해 전단 2만장이 담긴 풍선 1개만 날려 보냈다.” 이 설명의 초점은 반대 단체의 폭력성에 맞춰져 있다.
<중앙일보> 사설의 설명은 이렇다. “지역 주민들과 상인들은 트랙터를 몰고 와 진입로를 막기도 했다. 결국 파주시에서의 대북전단 살포는 무산됐다. 그러자 보수단체 회원 일부는 김포시로 이동해 대북전단 2만 장을 날렸다. 경찰은 이날 전단 살포 단속이 아닌 충돌 방지 차원에서 출동했고, 군은 전방에서 북한군의 사격에 대비해야 했다” 이 설명은 지역 주민들의 불안과 군과 경찰의 노고를 보여줬단 점에서 전단 살포가 ‘민폐’에 가까운 것임을 드러내려 했다.
▲ 27일자 중앙일보 8면 기사
한편 <한겨레> 사설의 설명에선 보수단체 회원들의 ‘막가파 언행’이 등장한다. 이런 식이다. “보수단체 회원들이 보인 막무가내 언행은 경악할 수준이다. 전단 살포를 저지하는 지역 주민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을 향해 ‘종북 노비들의 난동’이라고 비방을 한 것쯤은 약과다. ‘농번기인데 대북 전단 때문에 일도 못한다’고 항의하는 농민한테 ‘굶어 죽어’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사건 설명에서도 드러났듯이 전단 살포를 반대하는 단체를 비판하는 방식을 택했다. 27일자 <조선일보> 사설 제목부터가 <통합진보당, 이번엔 '對北 전단 南南 갈등' 파고드나>였다. <조선일보> 사설은 말미에서 “그렇다고 해서 민간단체의 대북 활동을 공격하는 행위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이날 임진각 일대의 충돌 현장에서 복면을 쓰고 풍선을 찢으며 가장 격렬하게 저지한 사람들은 통합진보당 파주시당 위원장이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민주 회복 파주 시국 회의'라는 단체 소속이라고 한다. 현장에는 통진당 소속 파주 시의원도 참여했다. 이런 사람들이 남남 갈등의 틈새를 이용해 활개를 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경찰은 이들의 실정법 위반 여부를 엄중하게 조사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전단 살포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단정하면서 전단 살포 방해는 법적 처벌을 주문하는 지극한 편향성을 드러냈다.
<조선일보> 사설은 “북한이 노리는 것은 명확하다. 남남(南南) 갈등을 고조시키고 남북 관계 경색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북한이 원하는 그대로다”라고 말한다. 전단 살포는 북한이 싫어하니 옳은 일이요, 방해는 북한이 좋아하니 나쁜 일이란 식이다. 남남갈등 자체가 문제라면 전단 살포를 안 하는 방법도 있다. ‘표현의 자유’ 때문에 전단 살포란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생각이 다른 이들의 ‘갈등’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면 <조선일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 27일자 동아일보 3면 기사
<동아일보>는 좀더 적극적으로 당국의 대응을 주문했다. <조선일보>가 ‘통진당’ 운운하며 붉은 칠을 했다면 <동아일보>는 전단 살포에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정부 당국을 좀더 강도높게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대북 전단에 南南충돌, 정부는 북쪽 눈치만 보고 있나>란 제목의 27일자 사설에서 “그제 같은 남남 충돌에는 정부가 ‘대북 전단 살포를 막을 수 없다’면서도 ‘전단 살포가 남북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 온 어정쩡한 태도가 한몫했다. 정부가 남북 대화를 의식해 사실상 북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다. 북에 자유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민간의 노력을 정부가 중단시키거나 위축시켜선 안 될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북한과 대화를 재개해야 할 정부 당국의 처지로 전단 살포를 격려할 수는 없다는 매우 초보적인 외교 전략을 무시하는 비평이다. <동아일보>가 대체 당국에게 뭘 원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중앙일보>도 ‘남남갈등’을 언급했지만 다루는 방식은 반대였다. <중앙일보>는 <위험천만한 대북전단 살포, 자제해야 한다>란 제목의 27일자 사설에서 “보수단체는 이런 정세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남북 간에는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처음으로 고위급 채널이 구축되려는 시점이다. 남북관계가 풀려 북한 주민의 생활, 다시 말해 생존권이 향상되는 것도 북한 인권 개선의 한 축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남북관계, 인권의 큰 틀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전단 살포 지역 주민들의 안전과 생명이다. 북의 군사적 대응이 현실화한 만큼 코앞의 주민의 안전과 생명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 주민들이 트랙터로 진입로를 막았겠는가. 현 단계에서 막무가내식의 전단 살포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자제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공공의 이익에도 맞다”라며 전단을 살포하는 이들을 비판했다.
▲ 27일자 한국일보 4면 기사
이어서 <중앙일보> 사설은 “정부는 헌법상 표현의 자유 보장과 규제법 미비로 대북전단 제한 방법이 없다고만 되뇌질 말고 보수단체를 설득하고 어떻게 해서든 뜯어말려야 한다. 북한도 전단 살포 문제를 이용해 남남 갈등을 조장하려 해서는 안 된다. 남한 정부가 시민단체의 모든 행동을 규제할 수 있다는 전제를 거둬들여야 한다. 더 이상의 조건을 내걸지 말고 남한과 합의한 2차 고위급 접촉에 나오길 바란다. 진정성을 입증하는 것은 그 길밖에 없다”라고 비평했다. 대북 전단 살포를 법적으로 금지할 수 없다는 전제는 공유했으되 정부가 그들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물론 같은 날 <한겨레> 사설은 정부가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한겨레>는 <대북 전단에만 ‘표현의 자유’ 외치는 정부>란 제목의 사설에서 “대북 전단 살포 문제에 대해 정부 당국은 끝내 무책임했다. (...) 남북관계에 대한 악영향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안전, 물리적 충돌 사태 등 모든 면을 고려했을 때 정부 당국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했는데도 경찰은 뒷짐만 지고 몸싸움을 수수방관했다”라고 비판했다.
<한겨레> 사설은, “전단 살포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누리려는 자유는 결코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자유’ ‘전쟁의 위험을 부추기는 자유’다. 그런데도 정부는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이들을 보호하고 있다. 카카오톡 검열 사태에서도 나타났듯이 정작 보호해야 할 표현의 자유는 침해하는 정부가 엉뚱한 대목에서 표현의 자유를 외치고 있으니 더욱 어이가 없다”라고 비판했다.
▲ 27일자 경향신문 10면 기사
<한겨레>의 비판도 일리는 있다. 정부의 입장과 해명이 일관성이 없고 정파적으로 지극히 편향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편향성을 극복하는 것이 정부를 비판하고 금지를 요구하는 것이기만 할 지에 대해선 진보진영도 성찰이 필요하다.
대북전단 살포는 ‘표현의 자유’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표현의 자유’의 문제를 포함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부가 민간단체의 대북심리전 수행을 ‘표현의 자유’의 영역 안에 놓을 때, 우리는 민간단체의 대북구호 활동을 진행하고 이것도 ‘표현의 자유’의 영역으로 놓을 수 있는지 물어볼 수도 있다. 풍선에 몇 킬로짜리 삐라가 들어간다면 우리는 거기에 약간의 쌀과 의약품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작정 보수단체가 잘못했고 이를 금지않는 정부가 잘못이라 말하기 보다는, 역지사지의 방식으로 대응하며 당파 간에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한 사회의 ‘상식’이나 ‘관용의 한도’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그러한 합의에서 도출하는 것이지, 어떠한 보편적 원리를 활용하여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상식적 기준이란 것들도 그 나라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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