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잇따른 탄핵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와 공론장에 깊은 충격을 남겼다. 계엄과 탄핵을 둘러싼 찬반을 넘어, 이 사건들은 헌정질서의 의미와 공론의 부재를 다시 묻는 계몽의 ‘현재진행형’이다. 촛불 이후의 10년은 정권교체만으로는 시대교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기획 「공론장을 되살리자」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했다. 1편은 협동조합 빠띠(권오현)와 코리아스픽스(이병덕)의 대담을 통해 디지털 플랫폼과 숙의 퍼실리테이션이 만들어낸 시민 공론장의 성과와 한계를 짚었다. 2편은 전세사기 피해자에서 정책활동가로 나선 이철빈 위원장과 함께, 시민펠로우십·크라우드펀딩으로 공론을 정책으로 연결하는 실험을 조명했다. 3편은 조은주 청년위원장과 윤왕희 교수를 통해정치를 권력 쟁취가 아닌 ‘커뮤니티 디자인’과 직업적 소명의 영역으로 재정의하며 청년 정치가 주류가 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했다.

그리고 4편의 무대는 지구시민화를 모색하는 ‘공존의 뜰’ 프로젝트다. 서울시교육감 10년을 거친 뒤에도 교육의 미래를 끊임 없이 고민해온 조희연 전 교육감의 이 새로운 모색은 정당·정부 바깥에서 “지구공화국 시민”을 길러내는 새로운 공론장을 세우려는 시도로 읽힌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여의도 ‘공존의 뜰’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대한민국과 지구공화국, 두 개의 국적이 일으킬 혁신 

미래 세대는 이중 국적자로 길러야 합니다.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놀라니 설명이 이어진다. “우리 아이들은 대한민국 국적만이 아니라, ‘지구공화국’의 국적·시민권을 함께 가진다는 상상력으로 길러야 합니다. 이중국적자의 마인드라고 할까요."

여기서 말하는 이중 국적이란 법적 신분의 개념을 넘어 세계와 자신을 바라보는 이중 감수성에 가깝다.

“내가 지구공화국의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중국·일본, 난민과 이주민,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지금은 자본과 사람의 이동, 관광과 이주가 국경을 넘나드는데 우리는 여전히 국민국가 시민권의 틀에 갇혀 타인을 대하고 있어요.”

그는 최근의 중국 혐오 시위와 배타적 정서를 두고 “단순한 우발적 현상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상상력 빈곤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짚었다.

“과거 시민권은 반상·신분을 넘어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내셔널 시티즌십(국민국가의 국적)이 되면서, 인종·민족이 다른 이방인을 배제하는 기준이 되어버렸죠. 이걸 뛰어넘는 지구 시민성을 한국이 선도적으로 제안해야 합니다.”

서울시교육감 재직 당시인 2024년초 직원들과 소통하고 있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재직 당시인 2024년초 직원들과 소통하고 있는 조희연

“소수자 경험을 한국의 소프트파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조 전 교육감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강대국 사이의 약소국·식민지, 동시에 소수자의 시선을 가진 사회”로 규정했다.

“우리가 강대국 눈치 보며 살아온 역사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자·약자의 감수성을 체화한 사회이기도 합니다. 그 감수성을 살려, 강대국들이 내놓지 못하는 평등한 지구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가 구상하는 지구시민학교는 단순한 ‘글로벌 인재 양성 프로그램’이 아니라, △ 디아스포라의 시선 △ 다문화·이주민의 경험 △ 약소국·소수자의 역사를 함께 배우는 "트랜스내셔널(초민족국가적)한" 상상력의 학교에 가깝다.

예전엔 디아스포라의 시선이 경계인·주변부였다면 이제는 오히려 미래의 중심 시선이 될 수 있습니다. 밀려난 존재들의 눈으로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앞으로의 리더십에 꼭 필요한 역량입니다.

다문화 꿈토링, “칼라풀 스쿨”의 첫 실험 

지구시민학교 구상은 갑자기 나온 발상이 아니다. 교육감 재임 시절 시작한 ‘다문화 꿈토링’(꿈토링 멘토링)은 조 전 교육감이 “가장 애착이 가는 사업 중 하나”라고 꼽는 프로젝트다.

“다문화 학생들은 이중·다중 정체성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 한국 학생들이 갖지 못한 다른 언어와 문화, 시선과 색깔이 있죠. 저는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이라고 봤습니다.”

다문화 꿈토링은 세계적 디자이너 이상봉과 함께 진행한 프로그램으로, △ 다문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패션·모델 토요학교(6개월 과정)를 운영하고, △ 학생들이 직접 디자이너와 모델이 되어 준비해, 마지막에 졸업 작품 패션쇼를 올리는 형식이었다.

“글로벌 사회에서는 오히려 한현민 같은 다문화성을 지닌 모델이 특장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 한국인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피부색과 배경을 가진 모델·디자이너를 키울 때 한국 사회 전체가 ‘칼라풀한(다인종을 포용하는) 사회’로 바뀝니다.”

조 전 교육감은 이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만들고 싶었던 건 일종의 ‘다인종 학생들을 포용하는 학교’였습니다. 다문화 학생을 ‘결핍’이 아니라 미래 인재로 보는 관점 전환, 그게 지구시민학교가 이어가려는 지점입니다. 음악·영화·다큐멘터리·인문학 등 다른 영역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더 확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2024년 6월 22일 열린 꿈토링스쿨 입학식에서 학생들과 포즈를 취한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맨 뒷열 왼편에서 9번째)
2024년 6월 22일 열린 꿈토링스쿨 입학식에서 학생들과 포즈를 취한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맨 뒷열 왼편에서 9번째)

“지구시민학교는 초국적 감각을 키우는 시민 리더십 함양의 배움터”

지구시민학교의 모습이 어떤 형태가 될지 묻자, 조 전 교육감은 정식 학위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다.

“태재대학교 같은 정식 학위 과정과는 다르게 운영될 것입니다. 지구시민학교는 비학위 과정이지만, 초국적 상상력(transnational imagination)을 기르는 학교입니다. 저는 이것을 사회적 지도자를 길러내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보고 있습니다.” (태재대학교는 온라인 기반의 자기주도 학습과 맞춤형 교육과정을 도입한 대안 고등교육 기관으로, 정식 대학 인가를 받은 곳이다.)

그가 구상하는 운영 모델은 비교적 유연하다. 기본적으로는 주 1회 진행되는 3개월 또는 6개월의 정규 과정을 두고, 필요에 따라 2박 3일·3박 4일 규모의 리트릿이나 집중 워크숍을 결합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아시아의 소셜 리더와 시민사회 활동가를 초청하는 6박 7일 집중 프로그램, 국내 중학생 대상의 ‘지구시민 가이드’ 과정, 해외 교포 자녀와 유학생을 위한 하계 학교·인턴십 프로그램 등도 구상하고 있다. 교육, 노동, 환경, 디지털 액티비즘(Digital Activism) 등 폭넓은 주제에 관심을 갖고 지평을 넓히겠다는 복안이다.

“노동 분야는 노동 국제주의 연수 프로그램으로, 직업병 활동가들은 아시아 활동가들과의 연대 프로그램으로, 빠띠 같은 디지털 공론장과는 아시아의 사이버 액티비스트(디지털 공간에서 사회 혁신을 추구하는 시민활동가)들을 초청하는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이 같은 아시아 연대의 중심이 되면 좋겠습니다.”

조 전 교육감은 국내에 이미 와 있는 유학생, 이주노동자, 다문화 기반 활동가들도 중요한 참여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그분들에게는 ‘정중히 초청받아 함께 배우는 경험’이 흔치 않습니다. 그런 기회가 단 한 번만 있어도 삶의 감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장을 꾸준히 만들고 싶습니다.”

“국경 없는 지식인회, 아시아의 이름으로 지구 의제를 말합니다”

공존의 뜰은 지구시민학교와 더불어 ‘국경 없는 지식인회’ 구상도 함께 준비 중이다.

“처음엔 지구시민학교 강사단 이름 정도로 생각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별도 실천 트랙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유럽·아프리카에도 ‘국경 없는 지식인’이 있을 수 있듯, 우리는 ‘아시아 국경 없는 지식인회’를 만들어 지구 의제에 대해 초국경적인 관점으로 논의를 만들어가자는 겁니다.”

그는 특히 미얀마 문제를 예로 들었다.

“미얀마 군부독재 상황은 한국의 70~80년대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아시아 시민·지식인들이 국경 없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로 연대해 미얀마 민주화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발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구시민학교와 국경 없는 지식인회는 서로를 보완하는 투트랙이다. 지구시민학교가 상상력·국제적 감수성·연대 역량을 기르는 교육 플랫폼이라면 국경 없는 지식인회는 그 역량을 지구 의제에 대한 발언과 행동으로 연결하는 실천 플랫폼이 되리란 설명이다.

“지구시민학교 연수를 마친 분들께 국경 없는 지식인회 멤버십을 열어줄 생각입니다. 교육 과정에서 나온 좋은 의제들을 아시아·세계와 공유하고 싶습니다.”

지난 12일 인터뷰가 진행된 공존의뜰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
지난 12일 인터뷰가 진행된 공존의뜰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

“정치 이전의 정치, 공론장을 지탱할 시민을 키우는 학교” 

조희연 전 교육감은 지구시민학교를 “정당 정치 이전에 공론장을 지탱할 시민성을 기르는 공간”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기성 정치나 이념을 재현하는 학교가 아니라, 사회를 이해하고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확장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가 이 표현을 꺼낸 데에는 8년간의 서울시교육감 경험이 담겨 있다. 학교 자치, 마을교육공동체, 학생참여 확대, 교육 불평등 완화 시도 등 나름의 성과가 있었지만, 한국 교육의 구조적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입시 중심 체제는 여전히 견고하고, 사교육 시장은 더 확장됐으며, 학생들에게 삶과 사회를 상상할 여유는 점점 줄고 있다. 조 전 교육감은 이 한계를 누구보다 뼈아프게 경험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전교조 해직교사 복직 과정에서의 해임 사태 등 정치적 논란도 겪었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교육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더 깊게 되묻게 됐다고 말한다.

지구시민학교 구상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는 기존 학교제도 안에서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들—삶을 바라보는 시야, 세계와의 연결감, 공적 감수성, 타인과의 협력 능력—을 다른 방식으로 실험해보려는 시도다. 특정 정치나 이념을 주입하는 곳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시민적 기초 체력을 키우는 장에 가깝다.

입시와 경쟁 중심의 교육이 놓치고 있는 영역, 교실 안에서만은 채울 수 없는 경험, 다문화·이주·아시아라는 새로운 환경적 조건을 품는 교육 모델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조 전 교육감의 시도는 다시 시작되고 있다. 지구시민학교가 지향하는 것은 단순한 프로그램 운영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더 나은 공론장과 시민 문화를 회복하기 위한 작은 출발점에 가깝다. 이 실험의 성과가 어디까지일지 지금이야 예단할 수 없으나, 여전히 절망하기엔 이르다는 그의 끝없는 모색과 실천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글을 쓴 김중배는 2023~2024년 ‘소셜코리아’ 책임편집위원을 지냈으며, 정책과 공론의 연결을 실험하는 독립 미디어 플랫폼 ‘어젠다뉴스’의 기획자다.

전 연합뉴스 기자이자 공공부문 전략컨설턴트로 활동해왔으며, 시민참여 기반의 민주주의 실험과 정책 생태계 혁신에 관심을 두고 있다. 현재는 공론장 설계, 지식 생태계 분석, 선거 전략 자문 등을 아우르며 다양한 영역에서 '공공을 다시 묻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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