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관해선 한 차례 글을 썼다(▶'케이팝 데몬 헌터스’, 소유권 포기한 K 컬처의 세계화). 영화가 일으킨 신드롬을 여러 차원에서 아우르는 넓은 범위의 논평이었다. <케데헌>의 긍정적인 면에 집중했던 글이지만, 모든 대상이 그렇듯 이면은 있다. 이번에는 영화 내부를 경유하며 비판적 관점을 풀어 볼까 한다.
<케데헌>을 처음 봤을 때 배경이 한국이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건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한국을 상징하는 기호와 표상들이 눈이 아플 만큼 난무한다. 거꾸로 말하면 그런 한국적 기호의 과포화 상태는 한국에서 일상을 사는 이들은 느낄 수 없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본 감각이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라면과 김밥을 먹는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 진수성찬처럼 김밥에 탐닉하거나 “라면 타임”을 의식처럼 치를 만큼 특별한 음식은 아니다. <케데헌>의 ‘한국’은 일상의 배경이 아니라 전시된 기호들에 가깝다. 비록 고도의 사실주의로 ‘고증’된 디테일을 품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무엇보다 주역을 맡은 아이돌 헌트릭스는 케이팝 그룹 같아 보이지 않는다. 동시대 케이팝에서 3인조 구성은 찾기 힘들다. 아무리 적어도 4인조 정도고 보통은 그보다 많다. 세 명의 멤버는 서사와 캐릭터 운영의 효율성을 위한 구성이고, 한편으로는 고전적 삼총사 이야기의 구성이다. 아닌 게 아니라 조이와 루미, 미라를 보면 할리우드 시리즈물 <미녀 삼총사>가 떠오를 때가 있다.
헌트릭스가 활동하는 양상은 아이돌이 아니라 팝스타 같다. 이 영화에는 케이팝의 근원인 기획사 시스템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세 멤버는 시스템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스태프들을 거느리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주도적으로 자작곡을 만든다. 케이팝 아이돌이 예외 없이 거치는 연습생 생활과 트레이닝, 프로듀싱 체계가 사라진 것은 물론 하루 종일 소화하는 스케줄도 없다. 기획사 시스템은 매니저 바비의 존재로 대치돼 흔적만 엿보인다. 멤버들의 의논만으로 공연 선곡을 ‘TAKEDOWN’에서 ‘Golden’으로 바꾸는 장면은 현실의 기획사 시스템에 대해 아이돌의 지위가 역전된 묘사다.

한국과 케이팝은 실은 <케데헌>의 표면이다. 서구인의 일상적 감각과 팝스타 시스템이 그 심층에 있는 배경이요 서사와 캐릭터가 움직이는 원리를 이룬다. 그 과정에서 매기 강 감독이 감춘 건 소위 케이팝의 '다크 사이드'라고 불리는 면모다. 시스템의 억압성과 아이돌의 종속성, 인권과 노동 문제, 매출 지상주의가 유발하는 질병이다. 이 논점들은 서구에서 케이팝에 관해 주기적으로 언급되는 담론을 이룬다. 영화에는 그것을 낳는 기획사 시스템이 부재하기에 문제도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케데헌>에 한국적인 것이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말했듯이 ‘K’의 기호와 표상은 넘쳐난다. 그 또한 분명 한국의 현실을 이루는 일부이지만, 취사 선별을 통해 수집되어 현실의 밑창을 드러내지 않는 외양이 전시된다. 서구인들이 흥미를 품을 만한 ‘K’의 신기한 면모는 증폭되고 불편한 면모는 표백됐다. 이 영화가 현실의 긴장감을 결여한 판타지라는 뜻이다. 흔히들 <케데헌>이 디즈니 만화영화와 달리 가상 세계가 아닌 구체적 현실 공간을 무대로 삼았기에 특별하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바로 그 점이 숱하게 나온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답습하면서도 새로움과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련된 한국이란 공간 자체가 서구인 눈에 비치는 것을 의식한 허구의 공간으로 각색돼 있다. 여기서 한국은 현지답사를 통한 치밀한 검증을 거쳐 실오라기 하나까지 재현해 빼곡하게 진열해 놓은 페티시즘의 대상이다. 한국인의 자의식에 차 있지만 서구에서 자라난 이가 품은 굴절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까. 매기 강 감독의 그런 정체성 덕분에 서구에서 흥미를 품을 만한 조각들을 정확히 가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케데헌>은 여러 층위의 서사로 건축돼 있지만, 그 모두를 관통하는 건 루미가 정체성의 혼돈을 딛고 서는 성장서사다. 그는 헌터지만 악령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상처를 감추지 않고, 더 이상 숨지 않고, 진실된 나를 긍정하자는 것이 영화의 전언이다. 케이팝이 서구에서 내걸어 온 건강한 이미지, ‘Love your self’ 같은 슬로건과 그대로 포개어진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케이팝의 상처는 매끈하게 감추어져 있다. 한국을 나타내는 ‘기호의 과잉과 상처의 부재’는 영화에 구조화된 코드이자, 서구에서 반 케이팝 담론을 회피하고 대중적으로 흥행할 수 있었던 전략이다.
루미의 서사가 구체성을 얻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가 겪는 혼란은 서구 서사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이틴 성장서사로 환원될 뿐, 그와 공명할 수도 있었던 케이팝 아이돌이 놓인 사회적 맥락과 만나지 못한다. BTS가 부상할 때부터 나왔던 서구의 비백인들에게 자존감을 주는 '선한 영향력' 같은 패턴화된 논평이 헌사되고 있다.
귀마를 쓰러트린 후, 루미는 목욕탕에 가고 짧은 옷을 입고 다니며 그동안 감춰 온 문양을 떳떳하게 드러낸다. 그 결말에 감동한 사람들이라면, 케이팝의 상처 역시 <케데헌>의 성공으로 덮어지지 않으며 더 나은 산업이 되기 위해 직시돼야 한다고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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