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권오석 칼럼]
“속국의 시대는 끝났다. 한국은 이제 세계 질서의 공동 설계자다.”
이 문장은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존 A. 매킨타이어 박사가 상원 청문회장에서 직접 밝힌 말이다. 그는 한국을 방문한 뒤 “이제 한국은 기술·안보·에너지·외교 모든 분야에서 수동적 동맹국이 아니라, 글로벌 질서를 설계하는 주체로 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우리는 이 발언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한국의 국제 위상은 이미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자리에 올라서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국내에서는 ‘우리는 약소국’이라는 오래된 자격지심과 패배주의가 남아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도한 자만심이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우리의 실제 위치를 직시하고 활용하는 자신감이다.
![미중 패권 경쟁(CG) [연합뉴스TV 제공]](https://cdn.mediaus.co.kr/news/photo/202508/314234_224342_4744.jpg)
4대 강국과 북한, 모두 한국 주시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축으로 한국을 원하고, 반도체·배터리 공급망에서 한국의 역할 없이는 중국 견제가 어렵다. 중국은 미중 갈등 속에서도 한국과의 기술·자원 거래를 유지해야 하고 한반도의 안정이 필요하다. 러시아는 북극항로와 LNG·수소 협력에서 한국을 중요한 파트너로 보고 있으며, 일본은 반도체·첨단소재와 안보 공조에서 한국 없이는 전략이 성립되지 않는다. 북한조차 제재 완화와 체제 안전 보장을 위해 한국의 중재가 절실하다.
즉, 모두가 한국을 필요로 한다. 다만 그 필요의 이유와 범위, 시급성은 제각각이다.
얽히고설킨 요구, 기회로 바꾸는 전략
이들의 요구는 상호 충돌하기도 하고, 때로는 겹치기도 한다. 예컨대 미·중은 기술패권에서 경쟁하지만, 북핵 문제에서는 안정적 관리라는 공통의 목표를 갖는다. 러시아와 일본은 역사·영토 인식에서 대립하지만, 에너지와 물류에서는 협력 가능성이 있다. 이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한국이 취할 길은 단순히 한쪽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 서두르지 않고 경청하며, 교차점을 찾아내고, 우리의 이익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필자가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소이부답(笑而不答) 외교’다. 들어주고, 웃되, 즉답하지 않는다. 단호히 거부하지도, 섣불리 동의하지도 않는다. 그 사이에 시간을 벌고, 관계를 다층적으로 얽어두며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는다.
![이재명 대통령(왼쪽)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연합뉴스 자료사진]](https://cdn.mediaus.co.kr/news/photo/202508/314234_224341_4730.jpg)
들어주고 미소 짓는 외교의 힘
이 전략의 핵심은 단순하다.
1. 경청 – 상대의 요구를 끝까지 듣고 진짜 목적을 파악한다.
2. 분석 – 요구가 겹치는 부분과 상충하는 부분을 구분한다.
3. 시간 확보 – 즉각 답하지 않고 ‘검토’ 명분으로 대응을 지연한다.
4. 간접 신호 – 의전, 방문, 발언 순서를 통해 의중을 비언어적으로 전달한다.
5. 다자 무대 활용 – 국제포럼·정상회의 등에서 의제를 선점한다.
이 방식은 단순히 ‘시간 끌기’가 아니다. 각국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구조를 유지하면서, 우리의 발언과 선택이 갖는 가치를 극대화하는 기법이다.
한국이 중심이 되는 순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반도체 산업만 봐도 그렇다. 미국은 ‘CHIPS법’으로 자국 중심의 공급망을 만들려 했지만, 한국은 미국의 요청을 전부 수용하지 않았다. 대신 유럽·동남아로 생산기지를 다변화하고 미국 내 투자를 통해 정치적 명분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한 기술 보유국이 아니라 ‘선택의 기술’을 가진 나라로 인정받았다.
방산 분야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무기를 수입하던 나라였지만, 이제는 FA-50, K2, K9 같은 국산 무기를 유럽에 수출하고, 동맹국들과 공동작전에 투입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단순한 수출 성과가 아니라 동맹 구조의 재설계를 의미한다.

국제 평화를 만드는 한국형 외교
오늘날 외교의 성패는 누가 더 많은 동맹을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협력의 중심’을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미 기술, 안보, 에너지, 문화에서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국가다. 다만 그 힘을 쓰는 방식이 중요하다.
소이부답 외교는 강대국 간의 요구와 갈등을 완충하고, 협력을 설계하며, 한국을 ‘빠질 수 없는 축’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즉,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우리를 찾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감 있는 한국, 준비된 한국
이제 한국은 단순히 ‘잘나가는 기술국가’가 아니라, 국가적 자각과 전략적 교양을 가진 외교 주체다. 우리의 과제는 이 위상을 스스로 인식하고, 세계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주고 미소 지으며, 시간을 벌고 조건을 설계하는 순간, 한국은 동북아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 국제 질서의 공동 설계자가 된다. 그 길은 결코 요란하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외교의 힘을 발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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