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얼마 전 일이다. 영화 평점을 공유하는 사이트에서 후배 한 명이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에 별점 3개를 줬다. 예상보다 낮은 점수에 스콜세지 팬으로 궁금해서(=참을 수 없어서) 연락을 했다. 재미있고 잘 만든 건 맞는데 너무 꼴 보기 싫다는 이유였다. 주인공이 꼴 보기 싫게 만든 게 감독의 의도니까 완전히 성공한 거 아니냐고 답장했다. 별점은 수정되지 않았다. 스콜세지 감독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행동했다고 생각한다.
<택시 드라이버>를 본 후배가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에는 몇 점을 줄지 궁금하다. 두 영화는 비자발적 독신주의자(Involuntary celibate, Incel) 키워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쉽게 쓰자면 인셀 조상님과 MZ 인셀이라고 할까.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으로 베시와 아이리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뒤 정치인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대신 얼떨결에 포주 일당을 쓸어버리며 도시의 영웅이 된다. <소년의 시간>에서 제이미는 같은 학교의 케이티에게 고백했다가 차이고 사이버불링을 당한 뒤 그녀를 무참하게 살해한다.
호감 있는 여성을 대하는 트래비스와 제이미의 태도는 정상적이지 않다. 트래비스는 베시와의 첫 데이트에서 그녀를 포르노 극장으로 데려간다. 기겁하는 베시에게 이런 곳에 같이 오는 연인들도 많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진심으로 말한다. 제이미는 나체사진이 학교에 퍼지는 바람에 패닉에 빠진 케이티에게 고백한다. 상처받은 상황이라면 자신의 위로가 통할 거라는 판단에서다. 전략적인 고백을 거절당하자 되레 앙심을 품는다. 외모지상주의에 빠진 케이티가 못생겼다는 이유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인셀 조상님과 MZ 인셀의 차이는 거절된 이후에 더 극명히 나타난다. 트래비스는 베시가 일하는 선거운동본부의 정치인을 암살하려 한다. 이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만, 도시에 있는 인간 말종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트래비스의 분노는 12살 매춘부 아이리스를 포주 일당에게서 구해내는 방향으로 흐른다. 반사회적 분노는 들끓지만 베시에게 직접 향하지는 않는다. 반면 20%의 남성이 80%의 여성을 차지한다는 2080 이론, 모든 여성이 골드 디거 기질이 있다는 레드필 이론을 믿는 듯 보이는 제이미의 분노는 케이티와 본인을 파멸로 이끌었다.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소년의 시간’
미리 말하지만 <소년의 시간>을 완주하더라도 제이미가 케이티를 살해한 명확한 해답은 찾을 수 없다. 끔찍한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히거나(1화 마지막에 공개된다), 정답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연출되지 않은 까닭이다. 널리 알려졌지만 <소년의 시간>의 연출적 특징은 컷을 나누지 않고 한 번에 찍는 원테이크 방식으로 촬영되었다는 점이다. 작품의 상영시간과 작품 내 시간이 일치한다. 노트북을 통해 증거로 잠시 보이는 CCTV를 제외하고 모든 게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상황이다.
따라서 <소년의 시간>에서 증거를 찾아내고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플래시백 등의 연출은 사용할 수 없다. 관련 인물들의 증언, 주변 인물들의 대화 같은 불완전한 파편을 모아서 어렴풋이 큰 그림을 맞춰나갈 뿐이다. 실제로 범행에 사용된 칼의 행방이 작품 내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명쾌한 스모킹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스모킹 건이 없으니 해답 역시 존재하지 않는 답답함은 막이 내린 후에도 씻겨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퍼즐을 맞춰야 하는 건 시청자뿐이 아니다. 제이미의 부모 역시 ‘착한 아들’로 믿어온 제이미의 단면을 보고 살인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뿐이다. 경제적으로 크게 부족함 없는 중산층을 상징하듯 잔디가 깔린 마당이 있는 번듯한 단독주택. 깔끔하게 정리된 제이미의 방에서 살인자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다. 문이 닫힌 방에서 제이미가 새벽 1시까지 SNS에서 어떤 글을 리포스트하고 댓글을 남기는지, 무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야 하는 경찰들도 제이미의 부모와 다르지 않다. 배스컴 경위는 케이티가 제이미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하트 모양의 이모티콘을 남겼다는 이유로 두 사람이 친한 사이였다고 추리한다. 결국 제이미와 같은 또래인 아들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케이티에서 제이미로 넘어간 하트 이모지가 사이버불링의 낙인이며 동조하는 이들의 표적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하트의 색깔마다 함의하는 바가 다르다는 사실은 아무리 학교를 쑤시고 다녀도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풍토병에서 전 지구적 유행병으로
씨네21의 이다혜 기자는 『아무튼, 스릴러』에서 사회적 풍토가 특정 방식의 사건을 만든다며 ‘스릴러는 풍토병과 닮았다’라고 말했다. <소년의 시간>은 영국에서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자신과 가족이 드라마를 시청할 정도로 메시지에 깊이 공감했다고 밝혔다. 또한 영국의 모든 중등학교에서 시청할 수 있도록 제공되며 자선단체에 의해 교사, 부모 및 보호가 시리즈에 대한 대화를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가이드라인과 리소스를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다혜 기자의 분석과 달리 <소년의 시간>이 담아내는 문제는 이미 전 세계적 유행병으로 번지고 있다. 서두에 언급한 인셀 조상님 <택시 드라이버>도 있지만 2019년 개봉한 토드 필립스의 <조커> 또한 인셀 삼촌 정도의 위치에서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왔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레드필, 2080 이론이 변형된 설거지론, 퐁퐁남은 이미 남초 커뮤니티를 통해 청소년들에게도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딸도 똑같이 키웠다’라는 에디 부부의 한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떤 이유로 같은 공교육을 받고 자란 남, 여의 가치관이 이렇게 차이 나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편집할 수도, 못 본 체할 수도 없는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스릴러를 즐기는 심리는 안전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다고 한다. 내가 보고 읽는 것이 나를 위협한다는 신뢰가 없다면 콘텐츠를 즐기기 힘들다. 그럼, 이제 스스로에게 되묻는 일이 남는다. 나는 <소년의 시간>에 몇 개의 별을 줄 수 있겠냐고.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가 꼴 보기 싫어서라는 줬다는 후배와 달리 별 세 개보다는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까.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어 이해할 수 없는 청소년들을 마주하며 세상을 이렇게 만든 부채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잘 만들었지만 꼴 보기 싫다는 말을 이제는 조금 이해한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