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새해가 밝았지만 정치권은 다들 하던 대로 하겠다는 분위기다. 가령 윤석열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여러 얘기를 나열했는데, “자기들만의 이권과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을 반드시 타파하겠다”고 한 것만 회자되고 있다. 여당의 대표격을 맡고 있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연일 ‘운동권 특권정치 청산’을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용산 대통령실과 여당이 호흡을 맞춰 새해에도 ‘야당 심판’ 전선의 형성에 골몰하겠다는 취지임을 알 수 있다.
신년을 맞아 각 언론사들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모아보면 지금과 같이 하던 대로 해서는 답이 없다는 결론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여론조사 결과들이 가리키는 바를 한 마디로 하면,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평가에 중도층 상당수가 부정적인데 그렇다고 야당이 이들의 표심을 흡수하는 형국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선거 전략의 성패는 여당 입장에선 대통령에 대한 평가로부터 스스로를 어떻게 분리할 수 있느냐, 이를 통해 야당으로 가지 않고 있는 중도층을 얼마나 데려올 수 있느냐에 방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런데 한동훈 비대위의 경우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으나 대통령에 대한 평가로부터 여당을 분리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비대위가 현재의 보수정치를 리뉴얼하고 용산 권력에 뭔가 진언을 하는 방향이 아닌,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권 출신의 ’유튜브 투사’를 비대위원으로 앉혔다가 막말 논란에 휘말리고 김건희 여사 관련 특검법 처리 등에 대한 별다른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게 이의 근거다.
그러다 보니 젊고 참신하다는 ‘이미지’로 차별화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보수 일각의 움직임도 보이는데, 이런 방식은 총선 전에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용산과의 차별화가 불가능하다면 ‘정치개혁’으로 포장한 ‘반정치’ 의제로 상황을 돌파할 것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있다. 의원 수 축소 등을 앞세워 현재 국회 시스템 그 자체를 공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대선이면 모를까, 총선을 앞두고 최소한 원내 제1당을 목표로 하는 지금의 국민의힘이 감당할 수 있는 아젠다가 아니다. 불체포특권 포기 이상의 대안이 나오기 어렵다.
뭐라도 붙잡아야 하니 일각에서 주목하는 게 ‘동료 시민’이라는 표현이다. 가령 중앙일보는 2일 기사에서 “‘공화주의’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라고 했다. 이 표현의 기원은 영어권에서 지도자가 ‘국민 여러분’ 비슷하게 사용하는 ‘my fellow citizens’에서 온 것으로 해석하는데, 미국에서 용례를 찾자면 조지 워싱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왕정이 아닌 민주-공화정을 전제하면서 개인의 주체적 권리를 강조하는 표현임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맥락에서 민주주의가 일반화 된 오늘날 국내에서 ‘동료 시민’이라는 표현을 특별히 강조해 사용해 온 집단은 소수자의 권리를 강조하는 이들이다. 민주주의가 정착됐음에도 제대로 된 시민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남아있으므로 이들이 제대로 된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점에서 ‘동료 시민’이라는 표현을 써온 것이다. 국가와 제도가 사실상 ‘시민’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동료’로서 바라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동료 시민’ 용례는 서구의 상투적 표현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이다. 또 예로 드는 사례가 개별 시민의 권리를 공동체가 지켜주는 것보다는 국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일을 ‘동료 시민’이 서로 조력하며 스스로 구제한 것에 가깝다는 것도 의문이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직접 언급한 “연평도 포격 당시 한 달 동안 연평도 주민께 쉴 곳을 제공”했다는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집권 여당 대표가 국민에게 “알아서 살아 남자”고 하는 게 ‘동료 시민’이란 말의 의의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동료 시민’이란 단어를 잘 쓰려면 그저 치장용 단어로 소비하고 말 일이 아니라 전통적인 보수정치 문법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써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앞서도 봤듯 오히려 ‘동료 시민’이라는 단어를 지금까지 보수정치의 맥락으로 끌고 들어가 의미를 협소하게 만들고 있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
그래도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중도적 제스쳐를 보여줄 거라는 기대를 갖는 이들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후보 시절엔 그런 기대를 받은 바 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오해(?)였다. 물론 한동훈 비대위원장에 대한 기대가 아예 근거가 없다고 할 순 없다. 가령 1일 MBC라디오에서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한동훈에게는 오른손과 왼손이 있어 보인다”라고 했다. 이 표현을 활용해 말하자면 야당과 거칠게 갈등하는 게 오른손이라고 할 때 장관 시절 인혁당 피해자 배상금 이자 면제나 4.3 직권 재심 청구 확대 등을 추진한 것은 왼손에 해당하고, 이 왼손을 어떻게 쓸 것인지가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왼손’의 사례로 거론되는 것은 대부분 법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결정한 문제였다. 인혁당 피해자 배상금 이자 면제는 법원 권고안을 수용한 거였고, 4.3 수형인 직권 재심 확대는 군사재판 수형인에 대한 대목이 이미 특별법에 명시돼 있기 때문에 검찰 업무의 범위 확대가 일반재판 수형인까지 가능했던 거였다.
하지만 여당 대표격의 지위에 있는 인물이라면 이런 정도 이상의 정치적 판단과 행동이 필요하다. 이미 존재하는 조건인 법리를 활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중도적 유권자층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만한 정치적 맥락을 스스로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료 시민’ 등 특정 표현을 구태한 보수정치의 포장지로 활용하는 기술에만 만족한다든가, 기자의 질문을 더불어민주당의 ‘사주’ 정도로 여기는 태도로는 역부족이다. 그건 앞서 언론이 거론한 ‘공화주의’와도 거리가 먼 태도이다. 2024년에도 2023년처럼 해서는, 목표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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