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라는 말이 화제다. 박근혜 대통령은 25일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이례적인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이 발언이 이례적인 이유는 대통령이 야당은 물론 여당 역시 함께 비난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이 말 한 마디로 집권여당의 지도부는 양분돼 자칫 잘못하면 붕괴될 위험에까지 처했다.

박근혜 대통령 발언을 잘 보면 정치권 전체를 겨냥한 것 같지만 특히 유승민 원내대표를 겨냥했다는 점이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다. ‘자기 철학과 논리’, ‘배신’, ‘패권주의’, ‘줄세우기’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는 게 그렇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지난 4월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합리적 보수, 개혁적 보수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야당과의 협상을 통한 정치를 공언했다. 이게 결국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배신하고 자기 정치를 하겠다는 행보라는 게 대통령의 인식인 걸로 보인다.

사실 유승민 원내대표 같은 사람이 새누리당 내에서 좀 힘을 받는 게 한국 정치를 위해서나 보수세력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나 나쁘지 않다는 의견도 많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당시 연설이 화제가 된 것은 사람들이 보수정권에 평소 기대하던 것들을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고집만 피우고 이상에 집착하는 ‘진보’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연하게 타협할 줄 아는 ‘보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정권에 이것을 기대했는데 절반의 임기가 지나갈 동안 이런 모습 못 보여줬다. 이런 상황에서 유승민 원내대표의 연설은 “아, 다음 대선에도 보수세력을 지지할만한 이유가 있겠다”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준 거라고 봐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히 신뢰를 중요시하는 정치인이다. 거꾸로 말하면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 즉 배신은 용납이 안 된다는 거다. 세간에는 불행한 가족사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대통령이었던 아버지가 측근의 배신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은 경험이 작용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썼던 자서전을 보면 10·26 이후 한순간에 자신에게 냉담해진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실망의 감정이 묻어 나온다. 이런 탓인지 여당 관계자들은 한 번 대통령 눈 밖에 나면 다시 신뢰를 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증언하고 있다. 자신을 위해 알아서 화끈하게 몸을 던지는 사람을 좋아하지 어떤 계산을 갖고 자신을 이용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싸늘해진다. 정치인으로서는 결코 좋게 봐줄 수 없는 자질이다.

▲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26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정책자문위원 위촉장 수여식에서 굳은 표정으로 인사말하기 위해 단상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유승민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이던 시절 비서실장을 맡은 바 있어 소위 원조 친박으로 불린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관계가 서먹해졌다. 국회 국방위원장을 하면서는 박근혜 정부가 언급을 꺼려하는 사드 도입을 앞장서서 촉구하고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에 대해서도 “청와대 얼라들”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비판했다. 원내대표가 되고 나서는 ‘수평적 당청관계’를 언급하며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다”, “경제민주화를 추진해야 한다”, “법인세 인상도 고려해볼 수 있다”면서 껄끄러운 발언을 계속했다. 공무원연금개혁 추진 당시에는 청와대가 나름대로 신호를 줬는데도 국민연금 명목소득대체율 인상이나 국회법 개정 등등을 야당과 합의했다. 조윤선 정무수석은 사퇴까지 했다. 이러다보니 결국 ‘찍힌 것’이다.

25일 의원총회 직후에 “청와대 식구들과 잘해보겠다”고 했고 어제는 거의 석고대죄 분위기로 읍소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이런 저자세에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통령이 선거로 심판하라는 데까지 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더군다나 유승민 원내대표의 지역구는 대구 동구인데 여기는 박근혜 대통령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벌써 일부 시민들이 직접 항의를 하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과를 넘어서 청와대 앞에 무릎꿇고 아스팔트에 머리를 찧어도 쉽게 수습되기 어렵다.

요즘 사과를 잘 하는 방법 등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과문을 잘 보면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렇게 좋은 사과가 아니다. 미안하다면서도 자기 할 말은 다 했다. 공무원연금개혁은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원하는 거였고 국회선진화법이 있는 상황에서 야당하고 합의 안 하면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논리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국회선진화법은 주지하다시피 박근혜 대통령이 만든 거나 다름이 없다. “이게 다 나 때문은 아니잖느냐”, 이런 얘기인 거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합의할 당시 청와대의 비판에 대해 “훈장을 받을 줄 알았는데 꿀밤만 맞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결국 같은 얘기다.

좋은 사과에는 세 가지가 들어가야 한다. 첫째는 자기 잘못의 인정이다. 둘째는 일이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한 자기 성찰이다. 셋째는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 방법 제시다. 박근혜 대통령을 대상으로 놓고 보면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과는 이랬어야 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치적 욕심에 젖어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버렸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며 오로지 박근혜 정부 성공을 위해서만 힘쓰겠습니다.”

물론 사과의 대상을 국민으로 한다면 좀 다른 내용이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죄송합니다. 제가 살아남으려다보니 대통령을 더 강하게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공천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들이받겠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미안하다면서도 일단 ‘버티기’를 선택했다. 주말 동안 새누리당 최고위원 8명 중 서청원, 김태호, 이인제, 이정현 최고위원이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 입장을 갖고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김무성 대표도 유승민 원내대표를 방어하기 어렵게 된다. 지도부 다수가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무성 대표가 사퇴 반대 입장을 밝힐 경우 그야말로 ‘정면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대통령 탈당’ 정국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탈당하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되지는 않을 것 같다. 비박계 의원들은 끼리끼리 모여 “지금이 왕정시대냐”는 둥 불평을 하고 있긴 하지만 나서서 청와대와 붙어보겠다는 분위기는 아니라는 흐름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도 돌지 않은데다 2016년 총선의 상황을 생각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친박’이라는 꼬리표가 선거에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증명됐지만 대통령을 적으로 돌리고 치르는 선거에서 과연 선전할 수 있을지는 확인된 바 없다. 승리를 자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결국 김무성 대표를 중심으로 한 비박계 인사들도 유승민 원내대표를 구해내지는 못할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이 마음을 고쳐먹는 게 아니면 유승민 원내대표가 살 길이 없는 상황이다. 새누리당이 박근혜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구질서에 안주할지, 유승민 원내대표를 한 축으로 하는 새로운 보수의 길로 나아갈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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