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진원지가 워낙 깊은 곳에 있어 이후 상황의 예측도 어렵다. 청와대와 여당인 새누리당의 갈등에 대한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여야 정치권을 싸잡아 비판하고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를 특정해서 ‘뭘 했는지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언급하면서 가히 여권을 중심으로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탈당 가능성을 논하며 신당 창당이나 정계 개편까지 고려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지만 청와대는 일단 이에 대해 26일 “소설같은 얘기”라며 선을 그었다. “박 대통령은 어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을 비판했고, 국민 신뢰를 저버리는 배신의 정치를 한다면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라는 부연이 뒤따랐다.

박근혜 대통령은 25일 발언에서 몇 가지 민감한 단어를 포함한 문장을 굳이 선택해 발언했다. “정치가 정도로 가지 않고 오로지 선거에서만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자기의 정치 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되는 것”, “국민과의 신의를 져버리고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정치”, “국민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만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 “정치적으로 선거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후에 신뢰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이 심판해주셔야 할 것”과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러한 문장들은 단지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위헌적 요소가 포함돼있다는 데 분노하였다거나 정치권 전체를 대상으로 비판을 내놓은 것이라는 해석을 뛰어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발언의 와중에 유승민 원내대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였다는 것에서 우리는 대통령이 하고 싶었던 말을 성공적으로 재구성해낼 수 있다. 즉,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원내대표가 ‘합리적·개혁적 보수’의 깃발을 꺼내 여당 내의 분열을 획책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챙겨 앞일을 도모하며, 오로지 이것을 이루기 위해 국민들을 외면하고 자신을 배신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선거에서 ‘국민들의 심판’이 필요하다고까지 언급한 것은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사실상 ‘정계은퇴’를 강요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부분이다.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퇴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일정 수위의 사과 발언 역시 나온 상황에서 청와대가 26일 또다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을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신호’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언론을 통해 “대통령 발언의 엄중함을 여당인 새누리당이 아직 무겁게 못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여당이 정부를 도와 국민에게 약속했던 사항을 실천해나가야 한다는게 대통령의 뜻으로 알고 있다”는 발언 등을 내놨다. 박근혜 대통령이 전날 ‘국민에게 약속했던 사항을 실천해 나가는 것’에 방해되는 인물로 유승민 원내대표를 사실상 지목한 상황에서 청와대가 이러한 입장을 재차 내놓은 것은 다시 한 번 사퇴를 촉구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재차 사퇴에 재차 사과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청와대의 ‘이빨’이 어디까지 들어갈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정책자문위원 위촉장 수여식에 참석해 다시 한 번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과 의사를 밝혔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대통령께서 국정을 헌신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계시는데 여당으로서 충분히 뒷받침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면서 “어떻게 하면 당정청 관계를 다시 정상적 관계로 복원시키느냐, 그리하여 국민들 안심시키고 당정청이 국민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그런 정부 여당으로 거듭나느냐가 중요한 시점”이라고 발언했다. 또, 유승민 원내대표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을 올린다. 박 대통령께도 거듭 죄송하단 말씀을 드린다. 박 대통령께서도 저희들에게 마음을 푸시고 마음을 열어주시길 기대한다”며 사실상 읍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승민 원내대표의 이러한 사과로 청와대가 ‘압박’을 거두게 될지는 의문이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과는 표면적으로 보면 자세를 한껏 낮춘 것으로 해석되지만 세부적인 내용을 보면 스스로 해야 할 말은 다 챙겨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26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정책자문위원 위촉장 수여식에서 굳은 표정으로 인사말하기 위해 단상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유승민 원내대표는 사과 발언을 통해 자신이 취임 후 지난 4개월 동안 가장 주력했던 것은 공무원연금 개혁이며 이에 대해서는 박근혜 대통령도 그 중요성을 여러번 강조했다는 점을 상기하도록 하고 있다. 결국 국회법 개정안을 야당과 합의한 것은 공무원연금 개혁이라는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 불가피했다는 논리인 셈이다. 또, 유승민 원내대표는 “우리 국회의 사정상 야당이 반대하면 꼼짝을 할 수 없는 그런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해 ‘국회선진화법’의 존재로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핵심 정책을 국회에서 원하는대로 관철시킬 수는 없다는 점을 역시 부각시켰다. 국회선진화법의 탄생에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가 상당 부분 작용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지금까지 ‘친박’ 출신의 원내대표들이 이런 저런 기회를 통해 국회선진화법의 개정을 언급했으나 현실화되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결국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과는 형식상 사과이긴 하지만 “훈장을 받을 줄 알았는데 꿀밤만 맞고 있다”는 기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과 참모들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고개 한 번 숙인 걸로 해결이 되겠느냐”는 얘기가 공개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유승민 원내대표가 ‘책임있는’ 조치를 취해야 하고, 그 책임있는 조치란 결국 사퇴일 수밖에 없다는 게 청와대와 친박계 인사들의 인식이다.

그러나 유승민 원내대표도 물러설 수 없는 입장에 처해있다.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서 유승민 원내대표가 지금 손에 넣고 있는 권력을 놓치게 되면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추락할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김무성 대표를 중심으로 한 비주류 출신 지도부 입장에서는 유승민 원내대표가 낙마할 경우 지도부 전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사퇴를 막아야 하는 입장이다. 김무성 대표에게 있어서 유승민 원내대표는 일종의 ‘순망치한’과 같은 관계라는 점이라는 해석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26일 오전 국회 중앙홀에서 소속 의원들이 배석한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의 메르스 무능과 거부권 행사에 대한 우리 당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결국 이렇든 저렇든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신경전과 유승민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한 대립구도는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이런 경우 중요한 것은 야당의 입장과 행보인데 새정치민주연합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어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이날 대국민호소문을 발표하고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책임을 물어달라. 국회를 무시하는 대통령의 불통과 독선을 심판해달라. 우리 당에 힘을 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정국에서 강경론을 꺼내들 수밖에 없는 게 야당의 입장이지만 국회 일정에 대한 사실상의 ‘보이콧’ 말고 꺼내들 카드가 딱히 없다. 박영선 비대위원장 시절 세월호특별법 정국에서 ‘장외전술’을 택했으면서도 이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사례가 재연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지금은 김상곤 혁신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당내 갈등도 잠재돼있는 판국이다. 결국 한국정치의 이 답답한 국면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으로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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