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표지석을 세워 달라고 했는데, 중국 측은 ‘안중근 기념관’으로 화답했다. 일본의 관방장관은 안중근 의사를 작년에는 ‘범죄자’라 비난하였고 올해는 ‘테러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비난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후 중국인들은 조선을 항일투쟁의 동지로 여기게 되었다. 그가 사형당한 후 많은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추모했고 연극도 만들어졌다. 30년 가까이 중국 공산당 총리(1949~1976년)를 역임했던 저우언라이(주은래)도 젊은 시절 이 연극에서 안중근을 연기하였다.
하지만 2천년대 이후 중국 정부는 안중근 관련 행사를 축소하였다. 이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좀 더 상세하게 살피면 중일 간의 역사문제는 한일 간의 역사문제와 다른 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상식 있고 사려 깊은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흔히 “일본 극우파는 정치영역에서 과잉대의될 뿐 평범한 일본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절반 정도만 진실’이다. 물론 일본 사회의 평균적인 시민들은 야스쿠니 신사가 웅변하는 그 역사의식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중국 하얼빈역에 19일 안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기념관이 전격 개관했다. 사진은 이날 열린 개관식의 모습. (연합뉴스)
투박하게 요약한다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관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야스쿠니 신사의 역사인식이다. 태평양전쟁(1941년)조차 백인들의 황인지배를 막기 위한 정당한 방어전이었다는 시선이다. 물론 이 극단적인 역사관에 동의하는 이는 흔치 않다.
둘째는 일본의 조선침략 전부를 부당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하지만 이는 일부 양심세력과 몇몇 좌익들에게나 공유되는 것일 뿐 평범한 일본인들은 이 역시 극단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 번째 시선은 일본의 베스트셀러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으로 대변되는 어떤 것이다. 이 소설은 훗날 <NHK>에서 역사드라마로 만들어져 2009년부터 3년에 걸쳐 방송되었다.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는 이 소설이 평균적인 일본인들의 역사관을 대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15년 전쟁은 나쁜 일이었지만 러일전쟁까지는 그럭저럭 용인할만 하지 않았느냐’는 시선이다.
‘15년 전쟁’은 한국인들에겐 생소한 말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년)까지 이어지는 연속적인 전쟁을 합쳐서 흔히 ‘15년 전쟁’이라 부른다. 15년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는 일본 역사학계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또 이 전쟁이 어떻게 태평양전쟁으로까지 번졌는지도 미스터리 중 하나다. 1931년에 일본 군부가 전쟁을 개시할 때 천황과 내각은 ‘설마 영미와 전쟁을 벌이지는 않겠지’란 생각으로 승인했다고 한다. 한 번 전쟁을 일으키니 브레이크 없는 폭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전쟁은 일본 국민들에게도 상처가 되었기 때문에 긍정하는 이가 거의 없다. 하지만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러일전쟁(1904년)까지의 시기에 대해서는 역동적이고 상승의 느낌을 가졌던 시대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침략에 대해서도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고 일본 역시 그러한 길을 가지 않았다면 식민지가 될 수 있었다는 정당화 논리가 존재한다. 심지어는 일본문화에 우호적인 백인들 역시 이런 시선에 동의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한일 간의 역사문제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인들에겐 식민지배와 전쟁을 똑같이 ‘악’이라 규정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 상식은 일본인들에겐 작동하지 않는다. 역사를 공부했다는 일본 청년들도 “조선과 일본은 전쟁을 한 적이 없고 외려 영미에 대항하여 함께 싸운 ‘전우’인데 어째서 우리를 비난하느냐”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의 국민들이 과거의 ‘모국’을 한국처럼 증오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점도 일본인이 한국인을 ‘유별난 종자’로 보는 이유가 된다. 당장 대만만 해도 일본에 대한 반감이 한국 같지가 않다.
이러한 역사인식에 대해 평균적인 한국인들은 ‘망언’이라고 분개하는 것 이상의 반박논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에 대해 ‘정서적이고 근거 없이 떼쓴다’란 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 중국 하얼빈역에 들어선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내부에 설치된 안 의사의 흉상. 하얼빈시와 하얼빈시 철도국은 19일 기념관 개관식을 갖고 안 의사 흉상 등을 전격 공개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에 반박하려면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이 ‘조선 침략’을 전제로 했던 전쟁이고 언제나 초전에 조선을 공격하면서 시작했다는 설명이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우금치전투(1894년)와 의병전쟁에 대한 남한대토벌(1909년) 사이 십 여년의 기간 동안 조선인들이 줄곧 저항했고 일본군에 의해 10여만의 의병이 사살되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이는 평균적인 일본인들의 역사인식에서 비어 있는 부분이다. 이 사실을 말해야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1909년)을 ‘의거’라 부르고 안중근을 ‘의사’라 칭하는 이유를 납득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중국인들의 입장에선 필요 없는 논쟁이다. 15년 전쟁의 명백한 피해자인 중국에겐 ‘강 건너 불구경’ 해도 되는 남의 싸움일 뿐이다. 그런데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 극우파의 역사인식에 손을 들어주는 행보를 취하자 중국은 이 ‘남의 싸움’에서 한국과 동맹을 결성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이는 위안부 결의안보다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쟁점이라 하더라도 15년 전쟁의 부산물이다. 한국인들의 상식처럼 조선인 위안부만 존재하는 사건도 아니다. 극우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사실 인정해도 크게 타격이 없는 사안이다.
하지만 안중근을 ‘의사’로 이해하기 위해선 일본이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했던 일들을 명백하게 그른 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일본인들의 전후 의식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한국만 그렇게 주장했다면 ‘당사자니까’라고 외면할 수 있지만 중국도 그렇게 생각한다니 그들 입장에선 황당하다. 결국 아베 신조의 ‘오버’가 일본인 상당수의 역사관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중국 측의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효과를 노리고 중국 측에 안중근 의사 표지석 설치를 건의했을까? 박 대통령 본인에게 이런 수준의 사려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외교 정책을 짠 이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박근혜 정부의 대일외교는 김영삼 정부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발언에서부터 이명박 정부의 ‘독도 방문 퍼포먼스’로까지 이어지는 민족주의 정서에 기반한 포퓰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가령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 정부에게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준수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굉장히 세련된 대응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제대로 된 사죄를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당신들은 과거에 이 문제에 관해 공식적인 사과를 하였으니, 그 전통을 계승하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외교적 발언을 조율하는 정책라인이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은 지일파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아베의 극우적 행보에 대응해 중국 측에 안중근을 언급한 이 행보에도 의도가 있었을 수 있다. 아베는 박근혜 대통령을 ‘바보’라 폄하했다지만, 이 추론이 사실이라면 이 영역에서만큼은 박 대통령이 바보는 아니었던 셈이다. 적어도 ‘안중근 기념관’만큼은 박근혜 대통령과 이 정부의 외교적 성과라는 평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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