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4월 아시아 순방 대상국이 확정되었다. 일본, 말레이시아, 필리핀과 함께 한국도 포함되었다. 당초 아시아 순방국에서 일본은 포함되고 한국은 배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정부는 물밑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을 위해 총력전을 벌였다고 한다.

이전에는 다른 얘기도 돌았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중국과 한국을 자극하는 행보가 이어지면서 미국이 통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아시아 순방 대상국에 한국은 포함시키고 일본은 배제할 수 있다는 풍문이었다. 이 풍문이 어느 정도 상황을 반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가능성을 느꼈다면 일본 역시 엄청난 로비를 펼쳤을 것이다.
▲ 13일자 중앙일보 3면 기사
요즘은 세계 각지에서 ‘외교 한일전’이 벌어지는 분위기다. 미국 곳곳에서도 ‘동해’ 표기문제나 ‘위안부 결의안’을 두고 갈등을 겪고 있고, 얼마 전엔 프랑스에서 위안부 만화를 두고 신경전을 펼쳤다. 어찌 보면 이 정도 ‘싸움’이 가능해진 것도 한국의 국력이 일정 부분 신장되었기 때문이니 뿌듯할 수도 있다. 비유하자면 아시아권에서 종종 벌어지던, 그것도 상대방은 별로 긴장하지 않던 한일전이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4강전 정도 되는 무대에서 상대방도 사력을 다하는 상태로 펼쳐지는 느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갈 뿐 문제는 풀리지 않는 분위기다. 일본의 우경화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과거사 문제로, 이는 일본 극우파의 이념의 문제라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변화 속에서 일본이 ‘평화헌법’의 규제를 뚫고 나오려는 문제다. ‘재무장’이란 말에까진 동의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입장에선 찜찜한 구석이 있는 부분이다.
전자의 문제는 안타깝지만 현재의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정치지형도를 볼 때 쉽게 해결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문제는 미국과 일본의 공모 하에 진행되는 일로 보인다는 것이 큰 문제다. 미국은 일본이 전자의 문제로 한국이나 중국 같은 주변국들과 갈등을 만들어내는 상황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 공모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이 이 문제에 관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이 있을까.
▲ 지난 1월 30일(현지시간) 프랑스 앙굴렘시에서 개막한 '2014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관람객들이 한국만화기획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지지 않는 꽃'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한국 기획전에는 기획전 조직위원장인 이현세 작가를 비롯한 만화가 19명의 만화, 일러스트 등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20개 작품이 소개됐다. (연합뉴스)
외교안보적으로는 친미국가이지만 국제무역에서는 중국과도 밀접한 관계인 한국은 동아시아의 긴장이 고조되면 고조될수록 난감한 처지에 처하게 된다. 일본과의 역사갈등 문제에서는 중국과 보조를 맞추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은 미국의 구상에서 함께 북한 및 중국을 포위해야 할 조력자의 역할이다. 그래서 한국은 MD 비슷한 방어체계를 받아들이면서도 중국을 의식해서 MD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해야 하고,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주장하면 또 이에 대해선 반대하는 처지다.
‘외교 한일전’의 과열을 마냥 즐기기에는 사정이 녹록치 않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대단히 쉽게 중국에 합류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만약 통일을 하게 된다면 곧바로 국경선이 맞닿는 초강대국과의 관계에서 독립성을 지켜내는 것도 녹록한 문제는 아니다. 최악의 경우 태평양 건너 있는 미국에게 종속적인 것이 차라리 더 나은 일일 수 있다.
박근혜 정부 역시 중국이 남북관계 문제에 있어 한국을 편들어줄 것이라고 너무 쉽게 낙관하는 편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비록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중국의 태도는 “이제는 남한도 북한도 ‘카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미국이 항공모함을 띄워 군사훈련을 실시하려고 할 때 중국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북한이 아산가족상봉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자꾸 키리졸브 훈련을 문제삼는 것도 자신들의 필요에 따른 것을 넘어 중국 측에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행위일 수 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과거사 문제를 떨쳐내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도 밀접한 관계에 있고 한국과 함께 아시아에서 몇 안 되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공감대도 가지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일본 사회가 정치적으로 좀 더 나은 선택을 했을 때 과거사 문제와 미국을 매개로 한 특이한 형태의 삼자동맹의 틀을 다시 짜야 할 필요성이 있다. 동아시아가 화약고가 되고 아베가 ‘제1차세계대전 이전의 영국과 독일’이라고 중일관계를 표현하는 시대에 한국은 ‘결코 만만한 국력은 아니지만 주변 강대국에게 위협은 되지 않는’ 자신의 위치를 십분 잘 활용한 선택을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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