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양연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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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화양연화>는 어떤 영화인가. 작년 겨울 진행된 왕가위 4K 리마스터링 특별전에서 <화양연화>가 상영되기 전에 왕가위 감독이 영화를 설명하는 특별 영상이 추가됐다. 왕가위 감독은 <화양연화>를 ‘비밀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다. 어떤 비밀인가. 여러 비밀이 후보군에 오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사랑에 관한 비밀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우(양조위)와 첸 부인(장만옥)의 배우자들이 불륜을 시작하게 된 비밀이다.

일단 영화 바깥에서 비밀을 파고든다면 이런 의견이 있다. JTBC <방구석1열>에서 변영주 감독은 차우의 아내와 첸 부인의 남편 사이의 불륜 자체가 없었다는 가설을 세운다. 사랑에 빠진 차우와 첸 부인이 죄책감을 덜기 위해 합의한 일종의 망상이라는 말이다. 불친절한 건 아니지만 여백을 잔뜩 남겨둔 <화양연화>의 세계관에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프로듀서를 맡았던 정태진 대표 또한 같은 방송에 출연해 변 감독의 가설이 맞는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

반면 왕가위를 인터뷰한 존 파워스의 책 『왕가위: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에서는 낭만적인 왕가위 세계관과는 다소 이질적인 ‘전기밥솥’이란 생활밀착형 키워드가 등장한다. 첸 부인의 남편이 일본에서 사온 바로 그 전기밥솥이다. 이 부분은 전기밥솥 덕분에 주부들이 가사노동에서 약간 해방됐다는 생활사의 맥락에서 이해가 필요하다. 호텔리어인 차우의 아내 역시 전기밥솥으로 가사 부담이 줄어 여유시간이 생기며 일탈의 기회가 생겼다는 말이다.

영화 〈화양연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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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영화 내에서 이 비밀을 파헤치는 건 차우와 첸 부인이다. 어렴풋이 배우자들의 불륜 낌새를 느낀 차우와 첸 부인은 홍콩에서는 팔지 않는 가방, 일본에서만 살 수 있는 넥타이가 서로의 집에 있는 걸 확인한다. 배우자에 대한 배신감, 서로에 대한 연민을 공유하며 오직 둘만 나눌 수 있는 고통을 함께 짊어진 둘은 색다른 방법으로 사랑의 근원을 찾으려 한다. 바로 상황극이다. 차우와 첸 부인이 제일 궁금한 건 ‘그들이 어떻게 만났을까’이다.

첸 부인의 남편 역할을 한 차우는 오늘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대사를 한다. 첸 부인은 남편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며 정색한다. 차우의 부인 역할을 맡은 첸 부인이 차우에게 스킨십을 시도하지만 금세 자괴감에 빠져 결국 상황극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실패로 끝난다. 그런데 두 사람은 다음 만남에서 이 부질없는 상황극을 계속 이어간다. 당사자 없는 상황극은 똑같은 상처를 두 사람에게 생기지 않을까. 그런데 새롭게 시작된 어쩌면 이미 진행됐을지 모를 비밀을 향해 나간다. 차우와 첸 부인의 사랑이다. 바람난 배우자들 때문에 깊은 고통과 상실감을 느낀 두 사람은 어떻게 그들과 같아졌을까.

배우자들의 불륜을 확인하기 전, 익숙한 Yumeji’s theme가 깔리고 국수를 사러 가는 첸 부인의 모습이 보인다. 국수를 산 첸 부인이 화면에서 사라지면 잠시 후 빈 곳에 차우가 들어서고 식당에서 완탕을 먹는다. 잠시 후 치파오가 바뀐 첸 부인이 또다시 국수를 사러 등장하고 둘은 좁은 골목에서 마주치지만 간단한 눈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또 다른 치파오를 입은 첸 부인이 국수를 사러 가는 길. 이번엔 식당에서 먼저 치우기 나온다. 눈인사를 더 길게 나눈다. 곧바로 비가 내린다. 우산이 없는 차우와 첸 부인은 식당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향하고 식사 약속을 잡는다.

대사도 없이 고작 국수 사러 가는 장면을 이렇게 오래, 여러 번 찍을 이유가 있을까. 그것도 동일한 구도로 세 번이나. 하지만 이를 같은 장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주치지도 않던 두 사람, 이웃끼리의 눈인사만 나눈 두 사람, 암묵적인 불안감을 안고 함께 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 영화는 같은 공간에서 일어난 두 사람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한다. 하지만 세 번의 만남이 조금씩 변화했다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첫 번째 상황극에서 상처만 남겼지만 차우와 첸부인은 곧 두 번째 상황극에 돌입한다. 이번 상황극의 테마는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이다. 레스토랑에서 둘은 서로의 메뉴를 주문해준다. 배우자들이라면 어떤 메뉴를 골랐을까 알고 싶다며 만난 둘은 정작 식사 도중에 그들이 하고 있을 일에 대한 대화는 나누지 않고 나란히 택시 뒷자리에 타고 집으로 간다. 택시 안에서 차우는 첸 부인의 손을 잡으려 하고 첸 부인은 조심스레 차우의 손을 뿌리친다. 어디까지가 상황극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일까.

영화 〈화양연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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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에 진정성이 깃드는 순간

손을 뿌리치며 끝날 것 같던 둘의 인연은 차우가 감기에 걸려 참깨죽을 먹고싶어 한다는 소리를 들은 첸 부인이 참깨죽을 한 소쿠리 끓여 이웃들과 나누어 먹으며 이어진다. 배우자가 자리를 비운 틈에 서로의 집에도 드나들 만큼 친해진 두 사람은 무협 소설을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발견하고 함께 글을 써보기로 한다. 남자가 새로 구한 작업실(2046호)에서 함께 소설을 쓰는 이들은 상황극을 이어간다. 그러나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 상황극은 앞선 상황극과 필연적으로 다르다.

세 번째 상황극은 배우자들에게 불륜을 추궁하는 장면이다. 여자가 있냐고 다그치다가 자기 분을 참지 못한 첸 부인이 차우의 뺨을 때리기도 하지만 순순히 그렇다고 대답하는 말에 결국 눈물을 터트린다. 서럽게 우는 첸 부인에게 차우는 말한다. 그냥 해본 거라고, 진짜가 아니라고. ‘어떻게 두 사람이 만났을까’를 통해 과거를, ‘그들이 무얼 하고 있을까’를 통해 현재를 추측하던 차우와 첸 부인은 마치 소설처럼 오지 않은 미래를 써 내려가고 그들의 진실보다 두 사람 사이의 진짜 감정에 주목한다.

이제 마지막 상황극이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상황. 남편을 떠날 수 없는 첸 부인을 위해 차우는 홍콩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된다’고 고백한다.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사랑이 시작되는지 탐구하던 두 사람은 이제 그들과 상관 없이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이별을 연습한다. 다신 찾아오지 않겠다는 차우의 말에 오열하는 첸 부인. 차우는 그녀를 달래며 다시 한번 말한다. 진짜가 아니라고. 떠난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그에게 첸 부인은 오늘 들어가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다음 장면. 홀로 생일을 맞은 첸 부인에게 일본에 있는 남편은 라디오로 신청곡을 보낸다. 애꿎게도 신청곡의 제목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라는 화양연화(花樣年華). 벽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은 등을 기대고 앉아 조용히 노래를 듣는다. 얼마 후, 차우는 결국 싱가포르로 떠나고 첸 부인은 홍콩에 남는다. 이후 두 사람은 64년 싱가포르, 66년 홍콩에서 재회할 기회도 얻지만 역시 만남은 이뤄지지 않는다.

따져보면 화양연화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과거지향적인 단어다. 타인의 삶을 평가하며 ‘그때가 너의 화양연화였어’라는 표현은 잘 쓰이지 않는다. ‘지금이 내 화양연화야’라고 선언하는 경우도 드물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스스로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반추했을 때만 화양연화라는 단어에 진정성이 깃든다. 그리고 진정성이 담긴 상황의 종료는 자연스레 질문을 남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언제 끝나는가.

영화 〈화양연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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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서 나로 그리고 우리로…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고, 여자는 뒤돌아선다.

 

영화가 시작할 때 뜨는 자막이다. 왕가위 영화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의 내레이션이 곧잘 쓰인다. <화양연화>에서는 내레이션 대신 영화를 여닫을 때 자막이 뜬다. 누구의 시점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막은 영화의 내용을 함축한다. 누군가 두 사람의 일을 관찰하고 기록한 이야기라는 분위기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자막을 쓴 사람은 누구일까. 이 모든 이야기를 겪은 주인공일까. 왕가위가 준비한 뜻밖의 엔딩은 이런 진부한 결말과 거리를 둔다.

첸 부인을 떠나 싱가포르에서 지내게 된 차우. 식당에서 식사하며 친구에게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하나 꺼낸다. 옛날 사람들은 비밀이 있을 때 산에 올라가 나무에 구멍을 파고 비밀을 말한 뒤 진흙으로 봉했다는 이야기. 친구는 너같이 비밀이 많은 사람이나 그런다며 면박을 준다. 차우는 딱히 반박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방문한 차우의 모습이 보인다. 차우는 벽에 나 있는 조그마한 구멍에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인 뒤 진흙으로 막아버리고 떠난다.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의 다른 작품들처럼 반복을 통해 주제를 강조한다. 국수 사러 가는 장면도 그렇지만 ‘Yumeji’s theme’ ‘Quizas, Quizas, Quizas’와 같은 삽입곡도 영화 내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다. 앙코르와트는 찬란했던 유적지를 남길 만큼 번성했지만,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쇠퇴한 캄보디아의 화양연화다. 벽면에 새겨진 부조들은 그만큼 오래되어 풍화된 옛사람들의 반복된 기억과 비밀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잖아요’라는 첸 부인의 말과 달리 차우와 첸 부인의 비밀은 그들 개인에게는 두 번 다시 없을 사랑이지만 셀 수 없이 반복된 뻔한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사랑 이야기가 속에도 <화양연화>를 기억함은 장만옥의 화려한 치파오, 양조위의 깊은 눈빛 때문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똑같이 국수를 사러 가는 장면에서도 처음에 각자 국수를 살 때와 마지막 국수를 사고 함께 집에 들어올 때의 두 사람의 감정이 다르고, 같은 운율의 Yumeji’s theme가 배경에 흘러도 차우와 첸 부인의 말과 눈빛, 몸짓과 행동이 바뀌어 감에 따라 관객에게 와닿는 진폭이 달라진다. 왕가위는 ‘같은 걸 통해 다른 걸 보여주라’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격언을 <화양연화>를 통해 완성한다.

치우가 떠나고 적막한 앙코르와트의 낮과 밤이 몇 차례 지나고 자막으로 열었던 영화는 마찬가지로 자막이 뜨며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들이 생긴다. 사랑은 어디서 시작되어서 어떻게 끝이 나는지. 또한 그들의 이야기(배우자들)가 어떻게 나(차우와 첸 부인)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관객)의 이야기가 되는지. 그들이었다가 나였다가 우리가 된 화자가 남긴 마지막 글은 다르지만 같은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같지만 다른 유일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지나간 세월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기에

그는 여전히 지난 세월을 그리워한다.

만약 그가 먼지 쌓인 유리창을 깰 수 있다면

지나간 세월의 그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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