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영화를 보고 나오면 아마도 누구나 영화의 엔딩크레딧과 함께 들려온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흥얼거리게 될 것이다. '남자도 없고 아이도 없고, 집도 없고 돈도 없다는데', 그런 찬실이가 복도 많단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스럽게 살아갈 요건이 하나도 없는데, 찬실이는 복도 많다며 타령처럼 부르는 저 노래가 '굉장히' 공감 있게 가슴으로 스민다.

그래서일까? 3월 5일 코로나19의 한가운데 개봉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조용히 관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2만 관객 돌파’ 자축 영상이 등장하는가 하면, N차 관람을 했다는 관객들도 늘고 있다. 무엇이 관객들로 하여금 찬실이를 자꾸 보도록 만드는 것일까?

왜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

해프닝처럼 감독님이 돌아가셨다. 새 작품의 고사를 지낸 후 이어진 술판은 술게임으로 이어지고 곤란한 질문을 받은 감독님이 엄살처럼 술상에 고개를 쳐 박았다. 흥행과는 인연이 없지만 예술적이었다는 감독의 명망 하나로 이어왔던 영화, 그 명망의 주인공이 사라지고 나니 프로듀서였던 찬실이는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고 만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이미지

가진 돈이 없어 이삿짐 트럭조차 다닐 수 없는 산꼭대기 마을 단칸방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 신세다. 영화가 좋아서, 감독님의 영화가 좋아서 그렇게 감독님과 함께 오래오래 영화를 만들며 살 줄 알았는데, 그 감독님이 없는 찬실이는 끈 떨어진 연처럼 오갈 데가 없다. 찬실이만 보면 일 잘한다며 입에 침이 마르던 제작사 대표는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꾼다. 니가 그동안 한 게 뭐 있냐고.

당장 돈이 없어, 없어도 너무 없어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던 여배우네 집 가사 도우미 일을 하게 되고 만다. 어느덧 나이는 마흔 줄,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다. 영화에 빠져 사느라 결혼도 못했다. 당연히 아이도 없다. 남자도 없다. ‘왜 그리 일만하고 살았을꼬’ 통탄을 해보니 모든 것이 손아귀에서 모래처럼 빠져 나가버린 듯하다. 늦가을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에 매달린 못난 모과가 꼭 자신과 같아 자꾸 돌아보게 된다.

답답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런 찬실이의 상황에 아마도 관객들은 묘하게 위로를 받을 것이다. 친구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서가 아니라, 세상에 나만 힘든 것 같았는데 여기 보니 '나만큼' 힘든 사람이 또 있네 하는 그런 기분이 아닐까. 굳이 찬실이의 한탄이 아니더라도, '번아웃'이라는 말이 사회적 현상이 될 만큼 우리는 일만 하고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거나 그게 좋아서, 그리고 도태되기 싫어서, 삶의 레이스가 그런 거려니 하고.

그런 레이스가 맘 먹은 대로 계속되면 좋으련만, 인생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서 어느 순간 거기서 튕겨져 나오고 만다. 내가 못 버텨서 혹은 세상이 날 못 버텨서. 코로나19로 팬데믹이 선언된 후 매일 대기업 하나만큼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는다고 한다. 바이러스를 붙잡고 따질 수도 없고, 속절없이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선다. 찬실이도 마찬가지다. 잘해보자고 마신 술이 그렇게 그녀를 백수로 만들 줄 알았겠는가. 그리고 돌아보니 손에 쥔 게 하나도 없을 줄 알았겠는가.

복은 스스로 구하는 자에게 온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이미지

그런데 여기서 2020년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모든 걸 잃은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찬실이는 그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탄식하던 그녀는 자신이 영화에 캐스팅하던 배우네 집에서 가사 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작은 규모의 예술 영화였다고 하더라도, 프로듀서라면 감독을 제외하고는 그 집단에서 제일 '윗사람'이었을 터이다. 그랬던 그녀가 손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부터 밥짓기, 청소를 마다하지 않고 한다. 영화 내내 찬실이는 참 바지런하게도 도우미 일을 한다. 그렇게 찬실이는 자신을 내려놓고 '호구지책'의 일선에 자신을 던진다. 여기선 '던진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내가 그래도 프로듀서였는데, 문화적인 일을 하던 사람인데 하는 허명 따위 ‘돈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말로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찬실이는 그래서 '복'의 가능성을 연다.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없고 남자도 없다며 한탄하던 찬실이는 그 복없음에 대해 '도전'한다. 까짓 5살쯤이야, 저 좀 안아주세요 했을 때 기꺼이 안아준 그 사람을 향해, 나이 차이 무시하고 무에서 유를 향해 도전을 외친다.

물론 그녀의 그런 도전 정신은 사랑에의 무모함, 썸과 호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로 인한 '해프닝'으로 끝난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도우미 일조차 쉴 정도로 낙담하게 만들고, 이불킥을 하며 벌떡 일어나게 할 정도로 부끄러워했지만, 그 '좌절'이 그녀에게 비로소 자신이 진짜 하고픈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결혼도 못했고 아이도 없고 남자도 없고 나이도 찼으니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보려던 찬실이는 이제 다시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 어설픈 사랑이나마 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내내 몰랐을 것이다.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뭔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이미지

그 돌아볼 힘을 주는 데 '장국영' 씨가 큰 몫을 한다. 장국영 씨는 누구일까? 귀신도 추위를 탄다는 그 없어 보이는 귀신. 그는 영화를 좋아했다던 주인집 할머니 딸의 추억이 만들어 낸 '영'일 수도, 혹은 찬실의 마음속 저 깊이 숨겨진 꺼져갈 뻔한 영화에의 열망이 만들어낸 '영'일 수도 있겠다. 아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가진 것이 없어도 여전히 참 씩씩한 찬실이를 위해 하늘이 굽어 살펴주신 것일 수도.

<아비정전>에 나온 옷차림 그대로 흰 런닝 바람으로 오돌오돌 떨며 등장한 장국영 씨는 찬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다. 말은 귀신이 가르쳐준 것이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도 '맨땅에 헤딩'하듯 씩씩하게 풀꽃처럼 살아가는 찬실이 스스로 길어낸 길일 터이다.

그 길이 중요한 것은, 그리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좋은 영화인 것은 막연한 위로로 퉁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지만, 지푸라기를 잡아선 안 된다고 영화는 말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니 힘들수록, 가장 본연의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가진 것이 없어도, 여전히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그 한 점의 불꽃을 피워올려야 비로소 제대로 살아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물론, 앞으로 찬실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된다는 보장은 여전히 없다. 앞으로도 찬실이는 오래도록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아이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찾은 그 길 위에서 찬실이는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막연하게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는데 중요한 건 무엇을 가지느냐가 아니라, 가진 게 없어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라고 영화는 에둘러 말한다.

사랑스런 찬실 씨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이미지

영화에서는 소피의 프랑스어 공부 시간에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등장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 시 문구는 그대로 찬실이다. 남편도 없고 아이도 없고, 이젠 정말 남자도 없는 찬실이가 그래도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가 끝날 때 보면 '인복'이 많다 싶다.

하지만, 그 인복이 어디 거저 오는 것인가. 주인집 할머니의 한글 공부를 스쳐 지나가지 않는 ‘배려’, 때로는 싸가지 없다 싶기도 하고 제 멋대로인 소피를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고 챙겨주는 ‘의리’, 비록 남녀 관계는 아니지만 쓰디쓴 '누나 동생'을 꿀꺽 삼키는 '아량'이 그간 찬실이가 얼마나 품이 넓게 사람들을 아우르는 프로듀서였을까를 증명해 준다.

그 직업적인 능력을 떠나, 시 속 풀꽃처럼 영화가 끝날 때쯤은 찬실이가 참으로 사랑스럽게 여겨진다. 모양이 아니라 그 향과 우러나는 맛으로 겨우내 사랑받는 모과처럼 말이다. 결국 '복'은 자기 깜냥이다. 사람들을 N차 관람을 하게 만드는 찬실 씨. 많은 사람들이 보고 어려운 시절에 진정한 위로를 받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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