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고 회사일이고 모두 귀찮은 당신. 휴일만 되면 집에 틀어박혀 츄리닝 입고 뒹굴며 한 손에는 술을, 다른 한 손에는 만화책을 놓지 않는 당신. 주말 새벽 2시에 만화책 보고 깔깔거리고 웃다가 '한창 연애할 나이에 이게 웬 청승인가' 싶은 당신. 하지만 그래도 그게 제일 행복한 당신의 이름은 바로 '건어물녀'.

손꼽아 기다려왔을, 이번 빨간 날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미디어스> 대표 건어물녀 중 한 명인 필자가 극장가는 것도 귀찮아하는 당신을 위해, 집에서 맥주 먹으며 혼자 느긋이 볼 수 있는 일본영화 3편을 골라봤다.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모두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작품들! 당신의 감수성을 촉촉하게 적셔줄, 서정성 넘치는 영화들에 한번 빠져볼까?

1. 돼지가 있는 교실(School Days With A Pig, 2008)

일본의 꽃미남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가 신참 교사로 등장하는 영화.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토마토를 좋아하는 돼지 P짱, 그리고 P짱을 키우는 6학년 2반 꼬마 아이들이다. 영화는 교사 츠마부키 사토시가 "모두 함께 1년간 잘 기른 뒤 잡아먹자"며 새끼 돼지 한 마리를 교실에 데려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 돼지가 있는 교실 스틸컷.
츠마부키의 의도는 아이들에게 생명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일깨워주기 위함. 아이들은 "(1년 후) 잡아먹자"는 말보다 당장 새끼 돼지의 귀여운 모습에 이끌려 P짱을 기르게 되고, 1년이 지나 P짱을 죽일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이 영화의 백미는 아이들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P짱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해 토론하는 부분. "사랑하는 친구를 어떻게 먹느냐" "우리는 이제 학교를 졸업하는데 현실적으로 누가 P짱을 키울 수 있다는 말이냐" 등등. "P짱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더 P짱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몸에 P짱을 남겨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 생명은 그렇게 돌고 도는 것" 등 윤회론(?)까지 등장하는 걸 보며, 아이들의 통찰력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나중에 관련 기사를 읽어보니, 감독은 의도된 연출을 피하기 위해 대본 없이 토론 장면을 찍었단다.

1990년 오사카의 한 초등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토대로 한 이 영화는 작년에 개최된, 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객 최고 인기 작품으로 꼽힌 바 있다. 생명의 본질적 의미와 가치, 아이들의 성장통, 파격적 실험수업이 전달하는 진정한 교육 등에 대해 음미해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단연 '최고!!'라 꼽을 만하다. 설렘이 가득한 초여름의 아이스크림 같은 영화. 완전 강추다.

2. 기쿠지로의 여름(Summer Of Kikujiro, 1999)

무뚝뚝한 소년 마사오와 철부지 어른 기쿠지로(옆집 아저씨, 전직 야쿠자)의 로드 무비. 이 둘은 판도라 행성을 지키겠다는 나비족처럼 원대한 목적이 있어 길을 떠나는 게 아니다. 무더운 여름방학, 딱히 할일도 없는데다 먼 곳에 돈을 벌러 갔다는 엄마가 보고싶었을 뿐.

▲ 기쿠지로의 여름 스틸컷.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갖가지 황당한 에피소드를 겪는 마사오와 기쿠지로. 영화에서는 '엄마 찾아 삼만리'와 같은 신파적 슬픔을 찾아보기 어렵다. 배경음악 히사이시 조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함께 이 둘의 여정이 코믹하게, 하지만 따뜻하게 그려질 뿐.

예측불허의 여행길에서 각종 모험(?)을 겪어가는 그들을 보며, 나 역시 여름날 쏟아지는 소나기 아래 길을 잃어, 이름도 모르는 초라한 버스정류장 안에 갇혀있고 싶다는 생뚱맞은 욕구를 억누를 수 없었다. 겨울날 뜨끈한 오뎅국물 한 그릇을 비운 것처럼 보고나면 가슴 따뜻해지는 영화.

3. 굿'바이(Good & Bye, 2008)

절대적 어둠의 세계로만 여겨져 온 '죽음'과의 교감을 시도한 영화. 갑자기 백수 신세가 된 다이고는 '연령무관! 고수익보장!'이라는 문구에 끌려 여행 가이드직에 응시, 합격한다. 하지만 그 곳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이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는 '납관' 일을 하는 곳.

▲ 굿'바이 스틸컷.
납관 도우미를 하다 아내에게 들켜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져"라는 소리를 듣고, 친구들에게는 "네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냐?"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지만 뭐 어떤가. 과연 우리들 인생의 마지막을 정성스럽게 닦아주고 보듬어주는 것이 천한 일이라 할 수 있을까. 다이고가 무릎을 꿇고 앉아 생을 모두 소진한 이들의 몸을 닦아주는 모습은 신성해보이기까지 한다.

영화에는 수많은 죽음들이 나오는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딸들이 관 속의 아버지 얼굴에 작별 키스를 남기며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말하는 장면.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버지의 육체와 딸들이 입은 고운 기모노의 선명한 대비, 절대적인 존재의 소멸 앞에서 고마움을 말할 수 있는 건강함. 터져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언젠가 닥쳐올 죽음을 그렇게 보낼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지 않을까? 죽음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톡톡 건드려주는 소중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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