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영 MBC 사장이 사퇴 의사를 밝혔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이사장 김우룡, 이하 방문진)의 수없는 질타와 지적에 굴하지 않고 담담히 제 갈 길을 가던 엄 사장이 결국 사퇴했다. 엄 사장은 자진해서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그의 사퇴를 ‘자발적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은 적다. 이번 사퇴와 관련해 ‘방문진이 자진 사퇴를 유도했다’ ‘사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주장이 MBC안팎에서 꾸준히 나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 8일 오전, 방문진 이사회에 참석한 엄기영 사장이 굳은 표정을 하고 있다. ⓒ송선영
앞서 방문진은 8일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이사회를 열어 황희만 울산 MBC 사장, 윤혁 부국장, 안광한 편성국장을 각각 이사 후보로 결정했으며, 이들은 MBC 주주총회에서 최종 임명됐다. 당초 엄 사장은 보도본부장에 권재홍 기자, TV제작본부장에 안우정 예능국장, 편성본부장에 안광한 편성국장을 각각 추천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사회 시작에 앞서 김우룡 이사장은 기자들을 향해 “정해진 것은 없다”며 “올바른 MBC를 세우는 것이 초지일관 방문진 이사들의 뜻이다. 내가 독자적으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해진 것은 없다’는 주장과 달리, 이사회에서는 정해진 그대로 됐다. 이전부터 MBC내부에서 돌았던 ‘황희만 윤혁’ 선임 소문이, 이사회를 통해 현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경영진 선임에 대한 MBC와 방문진의 이견, 처음

MBC와 방문진이 경영진 인사를 놓고 이견을 보인 것은 지난 1988년 방문진이 설립된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방문진이 사장의 인사안을 무시한 채 표결에 부친 것도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 동안 방문진은 사장이 추천한 인사안에 대해 인사권을 존중하는 의미로 통상적으로 선임해 왔기에 경영진 선임을 놓고 MBC와 방문진은 갈등을 빚지 않았다.

방문진이 MBC가 추진하고 있는 각 사안 사안마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대립각을 보인 것도 방문진 설립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방문진은 특정 시사 보도프로그램에 대한 문제 제기는 물론이거니와, 사장이 추친 중인 ‘뉴MBC플랜’의 이행 상황 보고를 받은 뒤 지적하는 등 사사건건 부딪쳤다.

구체적으로, 여당 이사들은 지난해 8월 MBC로부터 첫 업무보고를 받은 뒤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방송’ ‘언론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다’ 등의 말로 엄 사장을 질타했다.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위험과 관련한 <PD수첩>보도, 노사 단체협약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엄 사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등의 발언도 틈틈이 이어졌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11월 회의에서 ‘뉴 MBC 플랜 추진 현황’ 보고에 나선 엄 사장을 향해 “노력은 많이 했으나 그 결실은 적다고 본다”며 “엄 사장은 가시적 성과가 없다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의 ‘사퇴 압박’이었다. 결국, 엄 사장은 얼마 뒤 본인을 포함한 경영진 8명의 사표를 방문진에 제출했다. 방문진의 재신임을 받은 엄 사장은 MBC내부에서 ‘식물사장’이라는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

▲ 8일 오전, 엄기영 사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송선영
착착 진행되고 있는 ‘MBC 장악 시나리오’

문제는 MBC에 대한 방문진의 ‘간섭’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더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MBC 경영에 대한 관리, 감독의 권한을 갖고 있는 방문진이 그 권한을 넘어 사장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지금 시점에서, 앞으로도 MBC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을 멈출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현재 언론계 내부에서는 ‘MBC 장악 시나리오’가 돌고 있다. 지난해 방문진 이사진 개편부터 시작된 이 시나리오는 ‘뜬 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게 들어맞고 있다.

보수 성향의 인물로 방문진 이사진을 개편해 MBC에 대한 간섭을 노골화 하고, 보도와 경영에 대한 간섭 등을 통해 엄 사장의 자진 사퇴를 유도하고, 엄 사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면 자신들이 낙점해 온 낙하산 사장을 MBC에 보내 MBC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장악할 것이라는 게 시나리오의 주된 내용이다. 시나리오의 배후는, 정권이다.

▲ 8일 오전, 이근행 본부장이 김우룡 이사장을 향해 방문진의 일방적 행위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김우룡 이사장(맨 끝)은 아예 뒤돌아 창가 쪽을 바라보고 있다. ⓒ송선영
MBC내부 구성원들도 이에 대해 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본부장 이근행)는 8일 성명을 통해 “이로써 낙하산 이사 투입⇒엄기영 사장 사퇴 유도⇒낙하산 사장 투입⇒MBC 장악이라는 저들의 노림수가 노골적으로 그 본색을 드러냈다”며 “방문진에겐 이런 시나리오를 기획할 능력이 없다. 방문진은 그저 이명박 정권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라고 일갈했다.

이들은 “실제로 최근 청와대의 한 핵심 실세는 이번 기회에 사장을 갈아치우겠다는 뜻을 엄기영 사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며 “오늘(8일) 자행된 폭거는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집요하고 무자비하게 진행된 방송 장악 음모의 일환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엄 사장의 사표 제출로 MBC와 방문진의 충돌은 극에 달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러나 차기 사장 후보로 보수 쪽 인사들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엄 사장의 사퇴는 ‘낙하산 반대 투쟁’을 비롯한 더 큰 사태의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만만치 않은 방문진과 더 만만치 않은 MBC 사이의 갈등은 8기 방문진 이사들의 임기가 끝나는 오는 2012년 8월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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