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K(김인규 사장의 약칭)가 사장으로 출근을 시작한지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아 사내에는 IK에 대한 우호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병순 보다는 차라리 김인규가 낫다” “현실적으로 쫓아내는 게 가능한가, 일단 지켜보는 게 맞는 거 아닌가” “힘 있는 사장이 왔으니 KBS에 득이 되지 않겠나” 등등 IK에 대한 기대감과 관망론을 넘어 투쟁 자제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노조 집행부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신도 적지 않아 “저 노조를 믿고 무슨 파업을 하겠냐” “괜히 나섰다가 나선 사람만 피 본다” “정말 파업할 의지가 있기는 한가“ 등 조합에 대한 의구심도 만만치 않은 가운데 어제부터 파업찬반 투표가 시작됐다.

▲ KBS노조 조합원 200여명은 24일 오전 8시,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MB특보 김인규는 물러나라"고 외쳤다. ⓒ곽상아

또한 노동법 개정에 따른 조합의 규약 개정으로 파업 요건이 강화된 것도 상황을 녹녹치 않게 만들고 있다. ‘과반수 투표의 과반수 찬성’에서 ‘재적 조합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규정이 변경되어 70% 투표에 70% 찬성이 나와도 부결되는 상황이라 최악의 결과에 대한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파업찬반 투표가 부결되어서는 안된다. 파업찬반 투표의 부결은 특보출신 관제사장에 대한 KBS인들의 동조, 승인에 다름 아니다. KBS가 죽는 길이다. KBS인의 도덕성은 한 순간에 무너지고 우리 모두는 부당한 권력에 몸을 판 관제 방송인으로 낙인 될 것이다. YTN보다 못한 KBS를 다수의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수많은 시청자와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KBS는 지금 정권창출에 크게 기여한 특보출신 사장에 의해 관영방송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가 침묵하고 파업찬반 투표마저 부결시킨다면 국민들은 KBS에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참혹한 재앙이 되어 조만간 KBS의 심장과 살점을 도려내는 칼날이 될 것이다.

MB정권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상업방송시대에 공영방송은 ‘축소된 관영방송’으로 그 역할과 기능의 조정을 요구받고 있다. 방송에 대한 수요는 일정한데 공급이 늘면 어느 한쪽은 찌그러지게 되어 있다. 풍선효과가 바로 그것이다. 수신료를 올리는 일도 쉽지는 않겠지만 수신료를 인상한다 해도 재원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KBS의 방대한 영역을 줄이지 않고는 조중동 방송의 공간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 김인규 KBS 사장 ⓒKBS

IK가 설파했다는 불필요한 PD 300명과 기술 500명 설, 비정규직 구조조정 과정에서 K모 전 인력관리실장과 O모 개혁단장이 주장했다는 정규직 구조조정 불가피론은 상업방송시대에 한없이 추락하고 찌그러들 구색뿐인 공영방송의 조짐이다.

국민의 신뢰와 지지 없이는 구조조정이라는 권력의 칼날에 맞서 KBS를 지켜낼 수 없다. 권력에 장악된 공영방송의 부당한 현실을 온 몸으로 거부하고 맞서 싸울 때만이 국민들은 KBS를 지지하게 될 것이고, 국민들이 KBS를 지지할 때만이 우리는 우리 스스로와 KBS를 지킬 수 있게 될 것이다.

90년 4월 우리의 선배들은 관제방송의 사슬을 끊고 청와대 대변인 출신의 관제사장을 저지하기 위해 36일 동안 온힘을 다해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비록 관제사장을 내몰지도 못한 채 수십 명이 구속되고 해고되는 쓰라린 희생을 치렀지만 그 값진 희생을 통해서 KBS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진정한 공영방송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3당야합과 신공안정국의 살벌한 군사정권하에서도 우리 선배들은 당당히 떨쳐 일어나 KBS에 중흥의 기틀을 세웠다. 그 후 20년간 피땀 흘려 쌓아온 국민의 신뢰와 영향력을 여기서 무너뜨릴 순 없다. 투쟁과 희생 없이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파업 찬성으로 힘을 모아 투쟁에 나서 줄 것을 조합원 여러분께 호소한다.

조합 집행부도 심기일전하여 이번만큼은 강력한 투쟁을 이끌어 주기 바란다. 지도부가 몸을 던져 앞장서 싸울 때 조합원들은 뒤따르게 되어 있다. 패배를 두려워 마라. 90년 4월은 처절한 패배였지만 최선을 다한 패배였기에 방송민주화 투쟁의 큰 승리로 기록될 수 있었다. 정작 두려운 것은 패배가 두려워 투쟁을 회피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권력에 굴종하여 순치된 어용방송인으로 부끄럽게 살아 갈 것인가 아니면 굴종을 거부하고 크게 실추된 공영방송의 위상을 살려낼 것인가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무엇이 살길이고 무엇이 죽는 길인가? 지난 1년여 동안 겪은 굴욕과 수모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미 우리는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 더 이상 인내할 수도 없고 침묵해서도 안 된다. 역사 앞에 당당한 방송인으로 살아남아 시대의 진전을 이끄는 공영방송의 내일을 위해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자.

2009.11.27 전 노조위원장 현상윤

* KBS 사내 게시판(코비스)에 게재된 현상윤 전 노조위원장의 글을 본의의 동의를 얻어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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