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미디어스

Updated 2021.9.22 수 14:08
상단여백
HOME 미디어비평 탁발의 티비 읽기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뉴스를 시로 말하다[블로그와] 탁발의 티비 읽기
탁발 | 승인 2016.12.30 11:31

깜빡깜빡 잊게 된다. 요즘이 연말이라는 것, 그리고 좋든 싫든 2016년의 모든 것과 곧 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 등등. 그런 희미한 의식 속에서 어쩌면 감춰두고 싶었을지 모를 어떤 이별의 확인. 12월 29일 목요일은 손석희의 2016년 마지막 앵커브리핑이었다. 모를 리 없었던 일이었고, 하필 이날의 앵커브리핑 제목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였으니 덤덤히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니까 2016년의 마지막 앵커브리핑은 은근히 개별의 주제를 논하면서도 2016년의 모든 앵커브리핑을 정리하는 의미도 엿보였다. 보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찾아내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라서 그런지 몰라도, 그 마지막 앵커브리핑에 역시나 소개된 시에 더 주목했다는 의미다.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머피의 법칙,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곽재구 시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사평역에서’ 오랜만에 들어도 좋은 시는 여전히 좋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곽재구 시 중에서 가장 애정하는 것이 따로 있어서 이참에 함께 감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땅 끝에 와서 

황사바람 이는 땅끝에 와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보다 먼저
한 송이 꽃을 바치고 싶었다
반편인 내가 반편인 너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히죽 웃으면서
묵묵히 쏟아지는 모래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너는 결국 아무런 말도 없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바위 앞에서
남은 북쪽 땅끝을 보여주겠다고 외치고 싶었다
해안선을 따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아우성 소리 끊임없이 일어서고
엉겨 붙은 돌따개비 끝없는 주검 앞에서
사랑보다도 실존보다도 던져 오는
뜨거운 껴안음 하나를 묵도하고 싶었다
더 지껄여 무엇하리 부끄러운 반편의 봄
구두 벗고 물살에 서 있으니
두 눈에 푸르른 강물 고여 온다
언제 다시 이 바다에서 우리 참됨을 얘기하리
언제 다시 이 땅끝에서 우리 껴안아 함께 노래하리
뒹굴다가 뒹굴다가 다투어 피어나는 불빛 진달래 되리

지금껏 이런저런 글에 자주 시를 인용했었다. 그렇지만 전문을 쓸 수는 없었다. 오늘은 전문을 다 보여주고 싶다는 의욕과 용기를 참지 않으려 한다. 내가 이 시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반편인 내가 반편인 너에게”라는 딱 한 줄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를 분석할 줄도 모르고, 그럴 생각도 없이 시를 대해왔다. 그래서 해석 따위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한 구절의 의미와 아름다움에 누군가 더 공감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지옥이 사후가 아닌 현재였던 것만 같았던 2016년에도 희망은 있었다. 그 중에서 JTBC <뉴스룸> 또 그 중에서도 ‘앵커브리핑’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앵커브리핑’이 내게 시를 되찾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또 시를 통해 버렸던 뉴스를 찾게 해주었다. 뉴스는 팩트다. 그래서 때로 뉴스는 기계적 낱말들에 스스로 투옥되기도 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애써 행간을 우겨넣기도 하지만 전달이 문제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이자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9차 촛불집회가 열린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대통령 퇴진 촉구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앵커브리핑’은 그 난제를 시를 통해서 돌파했다. 윤동주부터 제페토까지. 사실 가을 이후 자주 한 시인이 떠올랐다. ‘앵커브리핑’에서 인용한 적도 있는 시인 바로 김수영이다. 그리고 대통령 탄핵 이후의 상황 때문에라도 더욱 김수영을 생각나게 된다. 4.19혁명이 있던 해 10월 김수영은 시 한 편을 썼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하략)

‘그 방을 생각하며’라는 시이다. 이 시를 자꾸 떠올리는 것은 불안 때문이다. 이 시를 쓰고 몇 달 뒤 쿠데타가 일어나고 기나긴 군사독재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6월항쟁의 끝도 그랬다. 이 불안이 그저 내 소심함 때문이면 좋겠지만 자꾸만 눈은 이 시를 핥고 있다. 이 시의 글자 하나하나가 다 지워지라는 의지를 담아 읽고 또 읽고, 정신차리자는 의미로 읽고 또 읽는다. 

그러나 내년 봄에는 이 시를 다시 읽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달랑 촛불 하나 드는 것뿐이지만.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탁발  treeinus@hanmail.net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탁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2길 22 가든빌딩 608호 (우) 07238  |  대표전화 : 02-734-9500  |  팩스 : 02-734-2299
등록번호 : 서울 아 00441  |  등록일 : 2007년 10월 1일  |  발행인 : 안현우  |  개인정보책임자 : 안현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수현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 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안현우 02-734-9500 webmaster@mediaus.co.kr

미디어스 후원 계좌 안내 : 하나은행 777-910027-50604 안현우(미디어스)
Copyright © 2011-2021 미디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mediaus.co.kr

ND소프트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