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일 <조선일보>에 뉴라이트전국연합이 ‘남산위의 저 소나무’라는 역사다큐드라마를 제작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인터뷰에서 “좌파정권 10년간 뿌리내렸던 자학적 역사관이 국민들 마음속에 우울한 자화상을 남기고 있다”면서 “대한민국 아버지 세대가 어떻게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제작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이 역사다큐드라마의 제작은 KBS <TV문학관>으로 유명한 장기오 PD가 주축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됐을까. 문화 연구자 홍성일이 찾은 답을 세 차례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세대의 갈라짐과 쪼개짐 이면은 신자유주의

“자본가와 지주를 나는 결코 장밋빛으로 아름답게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개인들이 문제로 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 일정한 계급관계와 이익의 담지자인 한에서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다른 입장과 달리, 개인이 이러한 관계들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이러한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칼 마르크스(2001), 「자본론」, 비봉출판사, p.6-7)

▲ 장기오PD의 저서 책 표지
왜 젊은 연기자가 안하무인이 되는 것일까? 그가 돈이기 때문이겠다. 돈이 되니 주변에서 그를 금지옥엽으로 떠받들고 이에 한껏 교만해져 후안무치해졌다. 그가 원래부터 그래서가 아니라 사회가, 방송 산업의 시스템이 그를 그리 만들었다. 시청률은 돈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예외적이다. 구조적으로 자본주의는 돈의 이름으로 사람을 대하도록 강제한다. 장기오 PD는 이렇게 말한다. “기존 질서나 가치관을 새롭게 조명해 보려는 작가의식이 있어야 하고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실험정신도 있어야 한다. 명예를 탐하지 않는 초연함과 함께 문학, 미술, 음악 등 전 방위적인 심미안을 가져야 시청률 지상주의에 백기를 들지 않는다.”(장기오(2003), “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속 깊은 관찰자”, 「PD가 말하는 PD」, 부·키, p.32)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장기오 PD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남들도 그리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들도 그리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들을 문제 삼기 전에, 세대들을 싸잡아 비난하기 전에 그들을 그리 만든 시스템을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독설닷컴을 운영하는 고재열 기자의 최근 기획은 흥미롭다. 그는 90년대 학번을 298 세대라 하는데, 이는 386 세대에서 88만원 세대를 뺀 것이라 한다. 386 세대와 88만원 세대의 중간에 자리 잡은 이들은 고재열 기자의 작명에 따르면 두 세대를 거치지 않고서는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세대인 셈이다. 고재열 기자 역시 장기오 PD처럼 세대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데, 장기오 PD보다 진일보한 것은 세대의 갈라짐과 쪼개짐의 이면에 있는 우리사회의 신자유주의화를 함께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맨 앞자리에는 산업화 세대인 경제개발 5개년 세대가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했듯이 이 세대도 아우르는 범위가 넓습니다.
1960년대 1970년대 대학을 다녔던 세대가 이 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대는 먹고사는 문제, 즉 경제에 주안점을 둔 세대였습니다.

그 다음에 민주화 세대인 386세대가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그 시작은 엄혹했으나, 그 나중은 심히 창대했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국민의 정부를 거쳐, 이들이 주축인 참여정부가 구축되었습니다.
지난 대선 총선까지 이들은 패배를 모르는, 승리의 세대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뒤에 문화 세대인 우리 298세대가 있습니다.

우리 다음 세대 특성을 보면
경제세대-정치세대-문화세대, 이 사이클이 다시 반복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다음에 IMF 세대인 88만원 세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사춘기 시절에 IMF를 겪었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는 비정규직 일반화를 겪었습니다.
IMF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이 다시 청년 실업 악몽까지 겪게 된 것입니다.
움츠려들 수밖에 없는 세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뒤에 다시 정치 세대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촛불 세대입니다.
미선이 효순이 촛불, 탄핵 촛불, 광우병 촛불…….
386세대의 자녀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자기 발언을 확실하게 하는 세대가 나타났습니다.
‘386플러스’, 혹은 ‘386 시즌2’ 세대가 등장한 것입니다.

아래 위 세대와 비교해서 298 세대의 특성을 구분하면 이렇게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제 개발 5개년 세대’가 이룬 경제 발전 덕분에 우리는 소비 세대가 되었습니다.
명품을 본격적으로 소비하는 세대가 우리 세대일 것입니다.
‘386 세대’가 이룬 민주화 덕분에 우리는 활발한 토론 문화를 가진 논객 세대가 되었습니다.
학생운동 리더가 아닌 PD통신과 인터넷 공간의 논객으로 활동하며 우리는 활발하게 자신의 주장을 알렸습니다.
88만원 세대처럼 절망적인 원경험이 없기 때문에 낙관적입니다.
이 세대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고재열, 386 세대와 88만원 세대 중간의, 289 세대를 아시나요?, 독설닷컴, 2008년 12월 3일)


산업사회에서 소비사회로의 이동과 신자유주의로의 새로운 자본주의의 변신 속에서 세대는 갈라지고 쪼개진다. 각각의 변신 속에 주된 경제 시스템이 달라지며 문화, 정치, 경제 등의 사회구성체의 전반적 변화가 생긴다. 소수의 사람만이 혜택을 받고 나머지 다수는 불행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재생산된다. 소수의 자리 또한 점점 더 적아진다. 장기오 PD가 염려하고 있는 5060의 소외는 그러므로 예의 없는 후배들의 그릇된 행태일 수도 있겠지만, 보다 깊은 이면에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신자본주의적 재편이 도사리고 있다. 그 속에서 점차 5060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소외되고 있다.

사회전반에 불어 닥치고 있는 불행의 일반화를 막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시스템, 돈의 논리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공적 시스템의 구축이 필수적이다. 방송만 놓고 보자면 그 어느 때보다 공영/공공 방송의 중요성이 크다고 하겠다. 다시금 정연주 전 KBS 사장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장기오 PD가 지적했듯 지난 10년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개인의 문제, 세대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 지난 10년은 한국 사회가 외환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로 재편되는 시기였다. 명예퇴진과 구조조정은 기업을 슬림화해 자본의 논리에 보다 유연하게 적응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사람의 피를 먹어 시스템이 살아남는 구조였다. 방송도 예외가 될 수 없어 구세대의 퇴진이 줄을 이었다. 시청률은 방송을 평가하는 유일무이한 잣대가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 방송의 공영성/공공성은 점차 자리를 잃게 되었다. 방송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공영성/공공성은 크게 흔들렸다.

지난 10년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년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단순히 조직 내부의 권력 관계와 이념적 호불호, 세대에 대한 반감만으로는 소외의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사람을 거스르는 시스템을 문제 삼아야지 사람만 바뀐다고 좋았던 옛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다. 또 옛 시대로 돌아가서도 안 된다. 오늘의 현실과 오늘의 조건에 반응하여 피부에 와 닿는 오늘의 문제를 사고해야 한다. 추억에 잠기기엔 현실의 속도가 숨 가쁘다.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지점부터 추슬러야 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공영성/공공성의 수호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상식적인 사람들이 정연주 전 사장에 대한 전 방위적인 퇴임 압력에 반대했던 것은 최소한의 공적 시스템의 자리, 공영방송의 근거지를 지켜내기 위함이었다. 정권의 입김에 좌지우지되지 않을 공영성과 공공성의 자리를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지 정연주 전 사장 개인을 지키기 위함은 아니었다. 상식적인 사람들이 정연주 전 사장 퇴임 후 함께 사라진 <미디어포커스>, <시사투나잇>을 지키려 했던 것도 방송의 공영성/공공성을 지켜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사람이 MBC의 민영화를 반대하는 것도 시장의 영역으로부터 공영성과 공공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상식적인 사람들이 중간광고를 반대하는 것도 광고주와 자본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방송을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런 시도를 번번이 좌절시키는 세력이 있다. 바로 장기오 PD와 함께 일할 뉴라이트전국연합이 그들이다.

그들의 홈페이지에서 방송정책만 간단히 살펴보길 바란다. 공적이나 돈이 안 되는 방송사업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민영미디어렙을 만들자고 하고 KBS 2TV를 분리해 MBC와 함께 민영화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오랜 기간 시장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작가정신을 유지해 왔고 이를 많은 후배 PD들에게 강조한 장기오 PD에게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어울리지 않는다. 장기오 PD는 “결국 TV의 가능성은 작품 내외의 저해요인 외에 반드시 작가의 정신과 의식이 수반된다.”(장기오(1997), 「TV 드라마 바로보기, 바로쓰기」, 박영률출판사, p. 121)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장기오 PD의 정신과 의식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장기오 PD의 작품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뒤늦게 본 그의 후기 작품에서 반복되고 있던 주제는 물질만능주의로 변한 세태에 대한 비판과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고집에 대한 존중이었다. 장기오 PD의 현 상황을 작품에 투사했다고 해석해도 큰 무리가 되지는 않을까 한다. 나는 그의 드라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와 같은 주제의식에 쉽게 끌리고 있음을 고백한다. 시대의 흐름에 선뜻 몸을 내맡기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처지가 남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그의 세계관을 전부 인정할 수는 없지만, 뚝심과 끈기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지켜낸 그의 작가정신만은 존중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대PD의 영예와 텔레비전에서는 드문 작가주의 PD라는 주변의 평가는 단순히 오랫동안 드라마를 만든 이들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타이틀이 아니다.

장기오PD, 뉴라이트 역사드라마로의 복귀 소식은 우울하다

▲ 12월 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장기오PD 사진ⓒ조선일보
그러나 드라마의 픽션이 현실의 픽션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장기오 PD가 연출을 맡게 될 <남산위의 저 소나무>는 순수문학의 세계가 아니다. 격동의 한국역사에 대한 PD의 평가는 우리 사회에 첨예한 논란을 야기할 것이다. 여전히 그 해석에 영향 받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당장에 역사적 사실 해석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촉발될 것이다. 작가주의는 이를 위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 <TV 문학관>은 달랐다. 문학과 영상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여러 다양한 가능성을 픽션을 통해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PD의 자율성은 극대화될 수 있었다. 작가주의는 그 속에서 빛날 수 있었다. 삶에 대한 관조이기 때문에 삶의 입체성을 빛내주는 다양성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재를 현실의 역사로 가져올 때 작가주의는 타협하지 않는 독단과 오집으로 빛이 바랠 가능성이 짙다. 다양성을 단일성으로 바꿀 수 있다. 소설에 비해 현실의 구체적 물질성은 작가주의의 창의성의 폭을 훨씬 좁혀 놓는다. 더욱이 드라마의 제작을 이미 이념적 색채가 짙은 뉴라이트전국연합이 맡고 있는 점은 위험스러운 부분이다. 기획 및 예산의 독자성 확보를 누구보다 강조했던 장기오 PD(장기오(1997), 「TV 드라마 바로보기, 바로쓰기」, 박영률출판사, pp.72-75)가 이념적 색채가 짙은 단체의 지원을 받아 제작을 하고 있다는 점은 의아하다. 자칫 그의 반평생의 작가주의가 이번 드라마로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가속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속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소외당하고 있다. 소외의 원인을 찾기 위해 모두 분주하다. 많은 이들이 이념적 편가름을 지목하지만 이는 부분적 설명은 될 수 있어도 적절한 설명은 될 수 없다. 적절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세대와 사회를 가르고 쪼개는 신자유주의를 언급해야만 한다.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는 공영성과 공공성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이념적 편가름에 매몰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시장의 논리 앞에 무력해진 개인만을 발견할 것이다. 좋았던 옛 시절의 추억만으로 힘든 오늘을 살아야 하는 초라한 개인 말이다. 현실이 고달플수록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고 그 와중에 스리슬쩍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이 쥐처럼 들끓기 마련이다. 시스템이 소외한 장기오 PD와 같은 작가주의 PD가 뉴라이트의 역사다큐 드라마로 복귀 사실을 알리는 오늘의 현실이 우울하다. 하지만 예언컨대, 장기오 PD도 그리고 우리 모두도 만족하지 못할 소란스러운 작품만이 나올 것이다. 기획 단계에서 엎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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