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지금보다 사람들이 정치에 덜 관심을 가질 무렵, 보수는 현실적이고 진보는 이상적이라는 편견이 존재했던 때가 있다. 이 편견에 의하면 진보는 현실에서 아직 도달하기 힘든 저 먼 곳을 가리키고 희망을 북돋으며, 보수는 그렇게 먼 곳만을 바라보다가는 자칫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있는 땅 바로 앞 절벽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를 하는 존재이다. 진보와 보수의 역할에 대한 이상적 우화와 같은 것으로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다.

1987년 이후 국민들은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을 번갈아 경험해왔다고들 생각한다. 노태우, 김영삼 정권은 보수정권이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진보정권이며 다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보수정권이라는 분류법이다. 과연 이 정권들이 이룬 업적들이 위에서 언급한 보수와 진보의 편견에 잘 들어맞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상당한 숙고가 필요하다. ‘정치개혁’을 강하게 언급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돈’에 방점을 찍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 정도가 그 ‘편견’에 맞는 일부 사례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편견에 맞지 않는 또 하나의 사례를 경험하고 있다. 보수가 이상을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무능하다는 점이 반복해서 드러난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메르스 관련 대책에서도 ‘보수 본류’로 볼 수밖에 없는 박근혜 정부의 무능은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다.

▲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7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국무총리실 브리핑룸에서 열린 정부의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대응 조치 발표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은 최경환 국무총리 직무대행. (연합뉴스)

정부는 7일, 메르스 최초 확진자가 발생한지 무려 18일 만에 확진환자가 발생한 병원의 명단을 공개했다. 총리 대행을 맡고 있는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직접 전면에 나서 상세조치에 대해 브리핑을 한 것은 사실상 사태 발발 이후 처음이다. 그동안에는 괴담 타령이나 하다가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정권의 ‘허점’을 노리고 움직이자 여기에 놀라 비로소 정부가 팔을 걷어붙인 것 아니냐는 냉소가 쏟아져 나온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와중에도 정부가 또 한 번의 무능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확진환자 발생 병원 명단에 오류가 있었다는 게 그 내용이다. 만일 명단에 올라와 있는 병원의 수가 수백 개 정도 되었더라면 그러한 실수를 사소한 차원의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표된 명단에 올라와있는 병원은 단 24개에 불과하다. 겨우 24개의 병원 이름을 발표하면서 병원의 이름과 위치의 정확성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것이다. 명단을 보아야 할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병원의 위치가 대단히 중요한 것임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서울 영등포구’를 ‘서울 여의도구’라고 쓴 것까지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겠지만 서울시 성동구에 위치한 병원을 경기도 군포시로 기재한 것은 아무리 마음을 좋게 가져도 납득이 불가능한 일이다.

정부가 반복해서 설명하는 대로 일반 대중에 만연한 메르스에 대한 위험은 과장됐다. 그러나 대중의 공포감은 메르스 바이러스의 치사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이 문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드러내고 있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메르스에 대한 이 거대한 불안감이 멈추지 않고 확산되는 이유는 괴담 유포자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지켜줄 수 없다는 확신을 정부가 반복해서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정부가 지금까지 메르스 문제에 대해 최선을 다해 대처했고 사태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줄 수 있었더라면 병원 명단을 두고 벌어진 ‘실수’는 이후 ‘해프닝’으로 기록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주위에서 모두 입을 모아 무능하다고 하는 와중에조차 무능했기 때문에 이 ‘실수’는 현실에서 무능의 절정을 장식하는 하나의 상징물이 돼버렸다.

이쯤되면 역시 문제는 대통령이라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소양이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해도 수십 년을 두고 발달한 관료제 덕분에 재난 등의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사람으로서 여러 우려스러운 모습을 노출했음에도 최소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시스템이 분명히 있다고 믿었다.

▲ 박근혜 대통령은 5일 메르스 환자 격리와 치료의 최일선 현장인 국가지정 격리병상을 방문, 메르스 대응 현장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도대체 사태가 왜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는 공무원들은 태생적으로 책임지는 것을 싫어한다. 괜히 앞에 나섰다가 정치에 휘말려 앞길 막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문제에 대해 공무원 조직이 역량을 총동원해 매달리려면 높은 사람이 총대를 메고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풍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 뭘 책임지겠다고 말하기는커녕 늘 제3자처럼 정부를 꾸짖기만 했다. 일 잘하는 공직자들을 표창하고 사기를 북돋는 게 아니라 오로지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같은 자기 측근을 방어하기만 급급하였으며, 해경을 해체하는 등 공무원 조직에 실질적인 타격(?)을 주는 조치를 단행하기도 했다. 직언을 서슴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뜻과 맞지 않는 발언을 하는 사람에겐 ‘레이저’ 공세로 일관했다. 세월호 참사를 거치면서 이제 공직사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에 완벽하게 익숙해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메르스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반복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 대통령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추측이 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신뢰하는 어느 전문가가 그런 설명을 하였을 것이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믿게 되었을 것이다. 메르스의 위험성과는 관계없이 정치감각을 발휘해 선제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사에게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느냐”는 식의 ‘레이저’를 쏘았을 것이고, 여론이 심상찮다는 보고에 대해서는 “메르스가 사실은 위험하지 않다고 하니 괴담이 퍼지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지시를 하였을 것이다. 그 뒤로는 모두들 쉬쉬하며 눈치를 살폈을 것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실상 방관 속에서 사태가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방식의 통치를 하고 있는지는 메르스 사태로 여론이 엉망이 된 상황에서도 청와대가 당·정과의 정책조정협의회 개최를 거부하고 유승민 원내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를 공격하는데 집착하였다는 사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메르스 사태로 국민의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보다도 유승민 원내대표의 ‘정치적 배신’이 대통령의 더 큰 관심사였던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도대체 무엇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정치인 박근혜를 상징하는 ‘원칙과 신뢰’라는 문구는 이제 오로지 박근혜 대통령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세상이 됐다. 통치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는 조언은 보수언론을 통해서도 수차례 나온 바 있는데 대통령은 꿈쩍도 않는다. 이런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2년 반도 더 남았다. 그러니 제발 이제라도 국가를 정상적으로 통치하는 데 힘을 쏟아달라는 목소리에 대통령이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현실적이고 유능한 보수’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바라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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