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고 연약한>은 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를 당한 것 같은 한 소년이 쓰러진 채로 피를 흘리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의 옆에는 누군가에게 문자를 발송했다는 메시지가 뜬 휴대전화가 떨어져 있습니다. 곧장 이어 바뀐 장면에서는 나가사와 마사미가 연기한 칸나가 "소중한 사람을 잃고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관객에게 전달합니다. 다시 장면을 전환한 카메라는 과거로 가서 칸나의 청소년 시절을 담습니다. 막 고등학교에 들어간 칸나는 어릴 적부터 단짝처럼 지낸 하루타가 있습니다. 둘은 누가 봐도 연인으로 보일 만큼 가깝게 지내지만 어디까지나 친구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 초반 몇 분은 <깨끗하고 연약한>이 어떤 영화일지 짐작하게 함과 동시에 관객의 이목을 잡아끄는 역할을 합니다. 죽어가는 소년을 먼저 보여주고 칸나의 의문이 더해지면 관객은 자연스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궁금증을 갖고 영화를 지켜보게 됩니다. 즉 신조 다케히코 감독은 <깨끗하고 연약한>을 청초하고 풋풋한 청소년 시절의 연애담으로 평범하게 문을 여는 대신, 마치 미스터리 영화처럼 이들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를 주목하게 만든 것입니다.

덕분에 청소년기를 지나 현재 시점의 칸나로 와서까지의 한동안은 꽤 재미있습니다. 여전히 큰 입으로 해맑게 웃는 모습이 예쁜 나가사와 마사미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비교해도 전혀 매력이 줄어들지 않았더군요. 시쳇말로 "썸을 타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칸나와 하루타의 관계는 제목처럼 깨끗하고 연약한 시절의 설익었던 감정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현재로 넘어와서 중간중간 삽입한 플래쉬백은 쭉 궁금증을 유지하게 하면서 칸나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합니다. 오프닝에서 했던 말처럼 과연 소중한 사람을 잃고도 다시 사랑하게 될지를 유심히 지켜보게 한 것입니다.

머지않아 칸나 앞에 료쿠라고 하는 남자가 나타납니다. 그도 칸나와 비슷한 상처가 있어서 <깨끗하고 연약한>은 공통분모를 가진 남녀의 연애담, 더 나아가 이른바 '힐링무비'가 될 것임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료쿠가 이야기에 들어오면서 집중력이 분산된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고 연약한>은 칸나처럼 과거에 매인 채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사연마저 동일한 구성방식으로 풀어가는 탓에 전개는 느려지고 몰입을 감퇴시키면서 지루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둘 다 과거의 상처에 사로잡혀 온전히 성장하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금세 호감을 갖는데, 칸나와 료쿠가 서로를 만난 것 때문에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서 가져야 할 갈등이 전무합니다. 이래서야 각 인물이 애써 상처를 간직하고 있을 이유도 없거니와 성장기이자 연애담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설상가상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는 작위적인 신파로 가득합니다.

적어도 <깨끗하고 연약한>이 동일한 상처를 간직하고 그로 인해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던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면 칸나와 료쿠의 관계에서 두 사람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더 신경을 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조 다케히코 감독은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와 <내 첫사랑을 너에게 바친다>처럼 이번에도 과도한 감수성에 기대서 영화를 물들이려고 했습니다. <깨끗하고 연약한>도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설레고 "죄책감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란 대사 등이 작은 울림을 전달하는데, 이 이야기를 순정만화처럼 마냥 예쁘장하고 맑게만 포장해서는 그 울림에 깊이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칸나에게 전해지는 하루타의 말은 우리가 깨끗했고 연약했던 시절에 진심으로 느꼈고 품었던, 그래서 더 순수하고 아프게 기억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처럼 떠올리게 해준 것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저로서는 4년 전의 그 시절 이후로 단 한번도 얻지 못했던 '진짜 사랑의 정의'를 듣고 짜릿한 감동을 얻었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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