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후드>는 비포 삼부작으로 유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신작입니다. 그가 동일한 배우들을 장장 12년 동안 캐스팅하여 한 소년의 일대기를 그렸다고 하여 화제가 됐습니다. 북미에서는 말 그대로 만장일치에 가까운 극찬을 받으면서 올해 최고의 영화에 올랐습니다. 궁금해서라도 보지 않을 수 없는 영화지 않나요?

<보이후드>는 메이슨이라는 어린 소년이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 밑에서 누나와 함께 자라는 성장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메이슨을 연기한 엘라 콜트레인은 12년이라는 촬영기간 동안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처럼 실제로 성장했고, 그 발자취가 영화에서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런 기획 자체로 <보이후드>에게 호기심을 가지기엔 충분하지만 이것으로 대단한 기대를 하는 건 금물이라고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보이후드>를 일반적인 정의로서의 감동적이거나 자극적인 영화로 생각한다면 지루하기 십상입니다. 상영시간도 자그마치 3시간에 육박합니다. 성장영화인 것도 맞는데 우리가 익히 본 그것과는 분명 궤를 달리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이후드>는 12년의 장대한(?)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다른 영화가 특정 시기에 한정해 그 사이에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드라마를 선사한다면, <보이후드>는 긴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짧게 발췌하는 형식에 가깝습니다. 예컨대 메이슨이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각 순간의 짧은 이야기를 꼴라주로 이어붙인 것이 바로 <보이후드>입니다.

바로 그래서 이 영화는 특별합니다. 극 중에서 볼링을 치다가 범퍼가 필요하다고 불평하는 메이슨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에는 범퍼란 게 없어" 그리고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대학에 입학하게 된 메이슨은 아버지에게 "지금까지의 그 모든 게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거에요?"라고 묻습니다. 아버지는 명확한 답 대신에 어물쩡 넘어갑니다.

아마 이 두 장면만큼 <보이후드>를 잘 설명하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메이슨보다는 그를 둘러싼 어른들에게 더 감정을 이입하고 몰입했습니다.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는 홀몸으로 애들을 키우느라 아둥바둥 살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던히 노력합니다. 그 와중에 두 번의 결혼을 더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마침내 딸과 아들을 모두 대학에 보냈지만 자신의 삶에서 이제 남은 건 장례식뿐이라고 합니다. 폰티악 GTO를 몰고 음악에 심취한 아버지는 한량 기질이 다분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이지만 세월이 흐르자 좋은 여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두 아버지 중 한 사람은 갑자기 알콜중독에 빠져 폭력적으로 변하고, 나머지 한 명은 자괴감에 빠져 가장 구실도 못하기에 이릅니다.

<보이후드>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이 모든 에피소드와 인물을 매우 평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마치 "삶이라는 건 원래 요람에서 무덤까지 굴곡과 방황으로 시작해 끝나는 것이니 새삼스럽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타 성장영화에서 다루는 갈등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이나 교훈을 주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영화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반면 <보이후드>는 제가 쓴 제목 그대로 삶의 이음동의어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과정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우리의 삶이라는 걸 강조하는 듯이 만났다가 헤어지는 사람이 부지기수고, 나중에 그들은 어떻게 됐는지 일언반구 없이 그냥 사라지고 말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다큐멘터리로 촬영했더라면 어땠을까 했는데, 굳이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은 극영화일지라도 소년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과장하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게 담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진짜 방황하는 건 어른이 되고 난 이후에 시작하지 않았나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메이슨이야 그 틈바구니에서 용케 성장하고 있으나 정작 끊임없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건 어른들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감히 메이슨의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요? 자신만의 답을 찾는 메이슨의 여정이 막 시작됐다는 걸 보여주면서 <보이후드>는 막을 내립니다. 엔딩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았는데, 아마도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이제야말로 험난한 세상에 발을 들이는 메이슨에게 든든한 지원군이라도 안겨주면서 끝맺고 싶은 욕심과 애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는 메이슨이 관객과 눈을 마주치는 찰나에 암전이 됩니다. 처음부터 몰입했던 관객이라면 흠칫 놀라고도 남습니다. 마치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의 일상을 훔쳐보던 사람들이 그가 바다를 건너 나가던 광경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그렇게 우리는 한 소년의 성장을 몰래 바라봤습니다. 그는 여전히 소년인 채로 끝났지만 기실 우리도 어른이 됐다고 할 수는 없으니 서로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이제 메이슨은, 그리고 여러분은 어디로 가시나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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