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저녁 경찰은 전날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염호석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의 삼성동 서울의료원 강남분원 장례식장에 침탈하여 시신을 강제인도했다. 그는 ‘삼성서비스지회 여러분께’라는 유서에서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하는 그 날 화장해 달라”고 당부했고, 부모에게 남긴 유서에서도 “제가 속한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 때 장례를 치러 달라”고 밝혔다. 일부 유족은 장례절차를 노조에 위임한 상황이었으나, 경찰이 시신을 탈취한 이후 다른 유족은 화장을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20일 경찰 병력을 동원한 가운데 화장이 실행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련의 사건의 배후에 삼성전자가 있음을 의심하였고, 경찰이 삼성전자에 공모하였다고 느꼈다.

비슷한 시각 경찰은 광화문에서 침묵시위를 진행 중이던 “가만히 있으라” 침묵시위단 95명을 연행했다. 침묵시위의 특성상 경찰이 연행 명분으로 내세운 경찰관 폭행과 도로불법 점거 혐의를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지난 주말인 17일과 18일 이틀간에 걸쳐 서울 도심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 중 200여명이 경찰에 무더기로 연행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잠시 주춤하던 박근혜 정부의 ‘강공 드라이브’가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강해졌다는 느낌이다. 시위대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넘어 확산될 것 같은 시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차단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어쩌면 세월호 참사 이전에 비해서도 중도파와 반대파를 확실하게 분리하여 관리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특히 ‘시신 탈취’라는 초유의 사건에서 어떤 이들은 ‘1991년 5월 투쟁’을 기억해내기도 했다. 1991년 4월 학원자율화 투쟁 중 백골단에게 맞아 죽은 강경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당시의 투쟁은 5월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이 안양 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정권으로부터 시신을 탈취당하면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연대투쟁으로 폭발했었다.
▲ 17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세월호 추모 촛불 집회를 마치고 청와대로 향하던 한 참석자가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앞 도로를 점거하다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시대, ‘1990년대로의 퇴행’일까?
박근혜 정부의 통치방식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이 말하듯 그것은 ‘1990년대로의 퇴행’을 말해야 하는 지경인가? 이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은 엇갈렸다.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는 “확실히 1991년의 상황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여겨진다”고 진단했다. 장석준 부대표는 “어쩌면 당시 노태우 정부와 지금 박근혜 정부의 상황이 권력분포의 측면에서 볼 때 흡사하다”라고 설명했다. 장 부대표는 “당시 노태우 정부의 경우 전두환 정부를 계승했단 지점도 있었지만 거스르기 힘든 시민들의 개혁에 대한 열망을 북방정책이나 부동산정책 등으로 끌어안는 지점이 있었다”라고 진단했다. 장 부대표는 “박근혜 정부 역시 비슷하게, 이명박 정부를 계승했지만 시민들의 개혁적 요구를 경제민주화 등으로 선거 당시 반영했던 지점이 있다”라면서 “물론 노태우 정부는 정책을 어느 정도 실행했지만 박근혜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팽개쳤다. 그 점에선 박근혜 정부가 노태우 정부만도 못하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시선에서 보자면 2014년 5월은 1991년의 5월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터닝포인트’가 된다.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는 “노태우 정부도 1991년 5월의 대응에서 자본편향적인 민낯을 드러냈다. 박창수 열사의 시신탈취가 그 정점이었다”라면서 “박근혜 정부가 현재 보여주는 모습도 이와 비슷한 상황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산인권센터 박진 활동가의 경우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것은 1990년대로의 회귀가 아니라 1987년 체제의 부정일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박진 활동가는 “물론 18일에 있었던 시신탈취는 1991년 박창수 열사의 시신탈취를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정황상 정부와 삼성의 공모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라면서도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것은 87년 체제의 부정, 그리고 유신체제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유신헌법을 기초한 김기춘과 같은 이가 대두되는 상황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박진 활동가 역시 “계속해서 그런 욕망이 부였지만, 특히 세월호 참사 이후 17일부터의 대응이 더욱 적극적으로 바뀐 것은 맞는 것 같다”라고 진단했다.
반면 저술가 엄기호의 경우 “회귀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동의하지도 않는다”라면서 “핵심은 보수정부가 지금의 조건에서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판단했다는 것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 19일 오후 서울 용산전자랜드의 한 가전매장에서 시민이 TV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대국민 담화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2/3의 통치’를 만드는 공안당국의 공포정치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의 ‘강공 드라이브’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는 “대통령의 담화문을 보면 이른바 ‘2/3의 통치’를 하겠다는 것을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장석준 부대표는 “지금 정국에서 유권자의 1/3은 어차피 박근혜 대통령의 열혈지지자들이다. 또 1/3은 어차피 박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그 가운데에 있는 1/3만 끌어들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월호 사건만 넘어가면 2/3의 통치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 박근혜 대통령의 의도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이른바 1/3을 포위하기 위한 분리전략인 셈이다.
다산인권센터 박진 활동가의 분석도 접근은 달랐지만 비슷한 결이었다. 박진 활동가는 “박근혜 정부의 통치방식은 기본적으로 국정원을 정점으로 한 공안당국의 공포정치”라고 분석하면서 “기본적으로 그 방향으로 가고 싶어 하지만 국정원 댓글 대선개입,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세월호 참사 등이 계속해서 발목을 잡는 상황인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박진 활동가는 “박근혜 정부는 공포정치를 통해 사람들을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지지자와 관망파와 적대자들을 분리해낸다”라고 설명했다.
저술가 엄기호는 박근혜 정부의 통치전략을 가능하게 하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무력을 지적했다. 엄기호는 “가장 중요한 것은 보수정권이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이 얼마나 허깨비인지를 촛불시위에서 알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야당이 형편없다는 것도 현 정부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라면서 “그래서 ‘막가파’로 개기다가 이번처럼 통치의 위기가 오면 담화문의 눈물처럼 ‘어음주고 현금받는’ 식으로 전략을 전환한다”라고 설명했다.
엄기호는 “이번 담화의 핵심은 '모든 것을 바꿈으로써 아무 것도 바꾸지 않겠다'는 전략이고 그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 본다”면서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바꾸라’고 말한 쪽이 말리게 되고 박근혜 정부의 추상적 약속을 수용하고 구체적 정책 수행에 대해선 양보해야 하는 ‘어음받고 현금주는’ 거래를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야권의 약화의 문제에 대해선 노동장 장석준 부대표도 공감했다. 장석준 부대표는 “1991년에는 여당 내부에도 김영삼 분파가 존재했고 야당의 경우 김대중이 시민사회 진영 목소리를 어느 정도 대변했다”라고 설명했다. 장석준 부대표는 “그래서 비록 굴절된 방식으로이긴 했지만 1991년 5월의 투쟁이 여당 내 김영삼 분파가 신군부 세력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식으로 반영이 된 측면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장 부대표는 “지금의 제도권 정당에선 김영삼의 역할도 김대중의 역할도 기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장석준 부대표는 “진보정당의 경우도, 1991년 당시엔 원내 의석이 없고 비합법 단체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진보정당에 비해 오히려 역동성이 있었다고 생각된다”라고 평가했다.
이명박 정부와의 차이?
박근혜 정부의 ‘강공 드라이브’는 비슷한 시기의 보수정권이었던 전임 이명박 정부와도 차별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두 정권의 차이는 성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상이한 맥락적 조건에서 나온 것일까?
▲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3월 27일 대전 현충원 천안함 46용사 참배를 마치고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는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장석준 부대표는 “이명박 정부의 경우 김대중 노무현 두 민주정부 10년의 흐름 뒤에 등장했기 때문에 박근혜 정부와는 상황이 달랐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도 달랐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장석준 부대표는 “비록 뉴라이트라는 방식으로 표출되긴 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시민사회운동과의 접점을 찾으려고 했고 그 상징이 과거 노동운동을 했으며 여당 내부에서 박근혜계와 불화한 이재오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지적했다. 장 두 대표는 “반면 박근혜 정부는 김기춘으로 대표되는 관료출신 인사를 통해 시민사회를 고려하지 않는 국가기구의 통치를 관철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상황의 차이가 전략의 차이를 낳았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통치술의 차이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다산인권센터 박진 활동가 역시 “이명박은 상인이고 박근혜는 국가주의자라는 식의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의 근본을 구별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면서 “이명박이 5년 동안 만들어놓은 것들을 활용해서 지금 박근혜가 보수세력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들을 실행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석준 부대표는 “그렇기 때문에 권력분포의 측면에서 볼 때 1991년의 상황과 현 시점을 포개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장 부대표는 “2003년 참여정부 시절 열사 정국에서도 1991년과 비교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양적인 접근이었을 뿐 정세적 유사성은 크게 없었다고 판단된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장석준 부대표는 정세적 유사성이 1990년대와 지금의 차이를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지적했다. 장 부대표는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시민사회의 역량은 크게 향상되었다고 봐야 한다”라면서 “비록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퇴조했다고는 하나 어떤 이슈가 생겨났을 때 주류 언론이 다 넘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이 정도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1990년대에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부분”이라고 평가했다.
분리통치에 대한 대응은 섬세해야
종합해보자면 민주화 이후 20여년을 통과하면서 생겨난 시민의식의 성숙이라는 호조건과, 그 세월동안 사회경제적 문제가 형성된 방식으로 인한 시민들의 탈조직화라는 악조건 속에서, 보수정부의 분리통치는 진보진영에게 대응하기 까다로운 것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2/3’의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1/3’의 고립 속에서, 저쪽 ‘1/3’을 고립시키기 위한 자구책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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