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 사는 기자는 조금 시간이 나서 어딘가를 가게 되면 자꾸 발걸음이 서울로 향한다. 철마다 바뀌는 서울의 고궁, 이제는 점점 낡아가다 못해 어느 틈에 아파트 숲에 먹혀버리곤 하는 한적한 주택가, 그리고 물은 비록 그 물이 아니되 여전한 한강. 누군가에겐 그저 숨 막히는 도시에 불과한 서울이지만, 그곳은 내가 살아왔던 추억이 어린 곳이다. 학창시절 원고지를 옆에 밀쳐둔 채 친구들과 헤집고 다니던 곳, 동동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곳, 현실의 압박감을 시원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며 잠시 잊었던 곳. 그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여느 사람들에겐 스치듯 지나가는 장소에 불과할지라도, 자신과 관련된 추억이 저장된 장소라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예사롭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2월9일의 <1박2일>은 '장소'가 가지는 본원적 의미를 가장 뜻 깊게 잘 살려낸 시간이었다.

처음 한 명, 혹은 두 명씩 조를 짜서 설날의 고즈넉한 서울을 돌아본다 할 때만 해도, 그저 지금까지 해온 서울 탐험이려니 했었다. 주어진 미션도 예전의 고궁을 들러보던 미션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처음 세워진 빌딩, 가장 오래된 다리, 찻집 등 역사책에 등장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는 역사가 된 서울의 어떤 장소를 돌아보는 미션은 <1박2일>은 물론 <무한도전>이나 <런닝맨>에서도 본 듯한 그런 것들이었다. 학림 다방에 소장된 LP판을 틀어 제목을 맞추고, 제일 오래된 빌딩에서 IT에 무지한 김주혁이 팩스로 자신의 사진을 보내느라 낑낑거리고, 오래된 빵집에서 숨겨진 빵을 맞추는 게임은 굳이 그곳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들이라면 무엇을 해도 미소를 띠고 보게 만들 그런 내용이었다.

한 시간 여의 시간 <1박2일>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서울의 오래된 장소를 찾아보고, 그곳에서 미션을 수행하고, 다시 둘씩 짝을 이뤄 또 다른 거리를 걷고, 거기서 미션을 하며 설정된 사진을 찍는 등 분주하게 설날의 서울을 활보했다. 그리고 마지막, 잠자리를 찾아 KBS 건물로 돌아온 멤버들에겐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동안 분주히 서울을 돌아다닌 멤버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 중 베스트를 뽑겠다는 명목 하에 모인 편집실에서 뜻밖에도 가장 좋다고 뽑힌 사진은 온갖 설정을 하고 찍었던 사진이 아니라, 명동 성당에서, 남산에서, 그리고 고궁에서 찍힌 평범한 사진들이었다.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변한 건 다음 순간이었다. 명동 성당 앞에서 주춤거리며 찍힌 김주혁의 사진 다음으로, 바로 그 명동 성당에서 데이트를 하던 김주혁의 아버지 어머니의 사진이 나타난다. 김주혁보다도 젊은 아버지가 멋쟁이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이어 나타난 사진은 그 젊은 김주혁의 아버지가 결혼을 해 아버지가 되어 아들인 김주혁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불과 몇 장의 사진이었지만 그 사진을 보는 순간부터 김주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 것처럼, 사진은 그저 사진이 아니라 명동 성당을 배경으로 한 한 가족의 역사가 되어 가슴을 흔든다.

서울이 고향인 차태현도, 김종민도 마찬가지다. 4대가 함께 서울에서 살아온 가족을 방문한 자리에서 펼쳐 본 앨범의 그 사진들과 비슷한 사진들이 차태현과 김종민의 역사로 등장한다. 4대 가족의 부모님이 남산으로 신혼여행을 가셨던 사진은 이때는 이랬구나 하고 신기한 것이었지만, 방금 전 내가 사진을 찍고 다녀온 그곳이 차태현 자신의 부모님 사진이 되면 마치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부모님이 계신 그 시간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아 전율과 함께 목이 메어 오는 것이다. 심지어 고등학교 시절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김종민에게선 그 감회가 극한에 이른다.

<1박2일>의 한순간을 통해 등장한 것은 김주혁, 차태현, 김종민 부모님들이 자식들보다도 젊은 나이에 찍은 사진 한 장이었지만, 그 사진만으로 남산, 명동성당, 고궁은 우리들에게 마치 김춘수의 시의 꽃처럼 다가온다. 김주혁의 '훅 하고 들어왔다'는 표현처럼 아마도 지금까지 <1박2일>이 방문했던 그 어느 장소보다도 유서 깊은 서울이 되었다. 명승지가 아니라, 일상에서 스치듯 지나쳐온 것들이 다른 이름의 명소가 되는 순간이다. <1박2일>을 본 사람이라면, 명동 성당을, 남산을, 고궁을 지나칠 때 이제는 남다른 감회에 젖을 수밖에 없도록.

전국 방방곡곡도 모자라 북한 그리고 일본에 있는 우리 역사의 흔적까지 샅샅이 훑고 다니는 유홍준 교수가 그의 책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통해 남긴 명언이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2월9일 <1박2일>의 서울은 바로 그, 사랑해서 달라진 곳이 되었다. 연인들이 걸어놓은 자물쇠 더미를 놓고 한 사람이 몇 번이나 걸어 놓을 수도 있다고 농을 던지며 미션을 하기에 급급한 장소에서, 자신의 부모님이 바로 그 장소로 신혼여행을 와 똑같이 사진을 찍었다는 역사를 안 순간 이제 그곳은 나만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장소가 되었다. 장소를 명소로 만드는 것은 결국 그 속에 담긴 소중한 사람들의 역사라는 걸 가슴 저리게 보여준 시간이었다. 이제 가볼 만한 곳은 다 가본 <1박2일>이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가 아니라, <1박2일>이 똑같은 곳이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해보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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