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엘리베이터에서 하루 종일 서있었던 경험 덕분에 줄곧 서있어야 했던 서너 시간의 대회 동안 남들보다 더 버티기 쉬웠다고 말한 오지영(이연희)이 드디어 1997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탄생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자리, 애초 그녀에게 미스코리아에 나가자고 했던, 그녀와 함께 달려왔던 형준(이선균)과 그의 동료들은 함께할 수 없었다. 드라마답게도, 그 시각 비비 화장품의 식구들은 부도난 회사의 기기를 떼어가려던 조폭들을 온몸으로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영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 기계마저 빠져나간 빈 공장에서 형준의 동료들은 눈물마저 흘릴 힘도 없이 널브러져 있다.

하지만 형준은 그런 빈 공장과 동료들을 놔두고 1등을 한 지영을 찾아간다. 비비화장품의 부도를 모른 채 해맑게 이제 자신 때문에 잘 될 거라는 말에 헛헛한 웃음을 날리다, 그녀가 잠든 사이 떠나려던 형준은 정선생(이성민)의 상처주지 말란 말 한 마디에 그녀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녀가 스스로 형준을 버릴 때를 기다리며, 절대 애인은 아니라며 매니저를 자처하면서.

오지영이 미스코리아가 되었지만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한 채 거리에서 그 방송을 지켜봐야 하는 형준, 그리고 공장 바닥에 널브러진 동료들이야말로 드라마 <미스코리아>의 결정적 장면이다. 삶의 냉엄한 아이러니, 잔인한 선물, 졸렬한 비애, 그간 잽처럼 날리던 그것들이 팡파레를 울리며 무시무시하게 다가온다.

<응답하라 1994>에서는 그저 나정 아빠가 잘못 결정한 주식 투자로 인해 휘청대고, 취직이 어려워 결혼마저 미뤄야 하는 처지에 빠졌지만,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곁에는 한결같은 쓰레기 오빠와 그가 아니라면 언제든지 달려올 칠봉이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IMF 시기를 그렸지만, 여주인공은 오뚝이처럼 삶의 성과물을 쟁취하고 남자 주인공들은 시대적 상황과 상관없이 잘 나가는 '의사'요, '메이저리거'였다. 그래서 덕분에 시청자들은 마음 놓고 쓰레기가 어떠하니 칠봉이가 어떠하니 투정부리며 그들의 사랑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스코리아>의 사랑은 치졸하다. 형준이 지영을 다시 만나게 된 이유가 그의 회사를 다시 살리기 위한 홍보 도구로 지영을 이용하기 위해서였고, 두 사람의 사랑은 미스코리아란 국가적 행사(?)틈에서 줄타기를 해야만 했고, 그 역경을 견디고 미스코리아가 됐지만 형준의 부도 때문에 애초의 목적은커녕 이제는 진심으로 충만한 형준의 사랑마저 초라해졌다.

대한민국에서 IMF의 현실은 <응답하라 1994>가 보여준 잠깐의 시련보다는, <미스코리아>가 보여주고 있는 징허디 징헌 운명에 가까웠다. IMF 이후 우리 사회에 고개 숙인 아버지 신드롬이 일어났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IMF체제가 드러내 보인 것은 결국 이 사회를 이끌어왔던 하지만 현실의 벽에 무너져버린 남성들의 민낯이었다. <미스코리아> 속 형준처럼 한때 자신의 학벌만 믿고 성장 가도의 대한민국에서 야심차게 자신의 꿈을 펼치겠다했던 그 남성들의 몰락을 의미한다.

애당초 자신의 회사를 구하기 위해 사랑했던 여자를 미스코리아에 내보내 홍보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겠지만,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발상인가 말이다. 마치 IMF를 넘기기 위해 전 국민적 금 모으기를 한 것처럼. 몰락해가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자식들의 돌반지이자 아내의 혼수품이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미스코리아>는 다른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얼마나 멋지게 여자 주인공을 위한 사랑을 어필하는가와 달리, 1회부터 16회 오지영이 미스코리아가 되기까지 남자 주인공의 치졸하고 궁색한 사랑을 보이기에 애써왔다. 투자를 위해 자신의 여자를 투자자인 친구의 접대 자리로 끌고 갔던 형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앞에서 서성이던 형준의 모습은 상황만 달라졌을 뿐 16회 내내 일관되게 그려져 왔다.

친구이자 자신의 회사를 노렸던 이윤(이기우)를 찾아간 형준이 고용 승계를 보장한 회사 인수를 요구했지만, 드라마는 자신의 회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형준과 동료의 모습은 스치듯 집어넣고 줄곧 미스코리아를 위해 복무하는 형준과 그의 동료들을 그리는 데 치중했다. 회사는 쓰러져 가고 조폭들은 신체포기 각서를 들이밀며 협박하는데, 오지영의 의상과 구두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애잔하기 이를 데 없는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 그 자체였다.

물론 <미스코리아>가 드라마의 주제 의식을 살려내는데 흡족했는가 하는 데는 의문 부호가 달린다. 이제 와 고백컨대, 권석장과 그의 동료와도 같은 이선균, 이성민이 <골든타임>에서 보여주었던 환상의 호흡을 기대하며 <미스코리아>를 보았지만 애초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 드라마를 만들었는지 의문이 들 만큼, 형준과 정선생을 들러리로 만들면서 지영의 미스코리아 만들기에만 골몰해 왔다. 때문에 이성민과 이선균의 좋은 연기는 이연희의 미스코리아 만들기 드라마에 애잔한 정서로만 터치되며 16회를 연명시켜 왔다. 이성민, 이선균만이 아니다. <보고 싶다> 등에서 발군의 캐릭터로 빛을 발하던 오정세는 리액션의 존재로만 소모되었고, <골든타임>에서 시청자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던 러브라인의 주인공 송선미도 그 매력을 온전히 드러내기엔 한참 부족했다.

<미스코리아>의 낮은 시청률이 굳이 관심을 끌기에 부족한 주제 때문이라고 핑계 대기엔, 이 드라마는 단선적 에피소드에 치중해 왔을 뿐이다. 때때로 이 드라마가 그려내고자 했던 것이 이연희 미스코리아 만들기만이었을까 의문이 생길 만큼. 작가와 피디의 숨겨놓은 서랍 어딘가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진짜 <미스코리아>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닌가 할 만큼. 그저 <별에서 온 그대>라는 강적을 만났다고 핑계를 대기엔 <미스코리아>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모습은 너무 초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럴듯한 판타지를 통해 아픔을 가리느라 급급한 드라마 세상 속에서 IMF 시대의 민낯을 그려내고자 애쓰는 <미스코리아>의 미덕은 여전히 희미하나마 가치가 있다. 부디 남은 4회라도 그 미덕의 불씨를 제대로 살려내는 드라마로서 마무리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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