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 방영되는 동안 두 번이나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첫 번째는 바로 이 드라마 속 사건이 시작인, 장태하가 만든 상가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부실공사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 건물을 장태하는 폭탄을 사용해 부숴 버린다. 80년대 건설 입국의 시대, 그 속에서 자재를 빼돌리는 등 '부실'로 몸을 불리던 건설 재벌의 실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그리고 그 무너진 건물 더미 아래서 하명근의 어린 아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회, 또 한번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이번엔 부실로 인한 붕괴가 아니다. 부실을 덮기 위한 의도적 폭발이 아니다. 건설 자재를 빼돌리며 부실공사를 한, 그리고 그것을 의롭게 알리려다 우아미의 남편 공기찬 대리가 죽어간 주상 복합 제우스가 '태하 건설'의 '결자해지'로 스스로 주저앉아 내렸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그토록 많이 접한 부실공사 문제가 ‘이렇게 해결될 수도 있구나’, 보고 있는 내 눈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해결되어야 하는구나, 하지만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그저 재밌는 드라마라 여기며 박수쳐 주기엔 많은 생각이 오간다. 하지만 도저히 현실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구나. '사람'이라면 해낼 수도 있겠구나라는 깨달음이 두렵다.

두 개의 건물이 무너지는 '수미상관'의 어법 사이에, 또 하나의 '수미상관'의 장면이 겹쳐든다. 아들의 손을 잡은 아버지이다. 처음 노란 유치원복을 입은 아들의 손을 잡은 아버지는 나쁜 놈이다. 사실은 아버지가 아니다.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태하를 죽이기 위해 그의 집에 갔다가 얼떨결에 그의 아들을 유괴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유괴범이었던 아비와 유괴를 당했던 아들은 다시 손을 잡고 간다. 예전에는 조그마한 아들과 커다란 아비가 쫓기듯 길을 걸었지만, 이젠 반대로 쪼그라든 아버지와 듬직해진 아들이 웃으며 손을 잡고 산길을 오른다. 허우적거리는 아비의 걸음에 아들은 다가와 손을 잡아 지탱해준다.

영화 <화이>에서 자신이 유괴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화이는 자신을 키워준 아비들을 모두 죽인다. 그 아비들과 함께했던 시절을 추억할 여지도 남기지 않고, 영화의 남은 시간을 몽땅 아비와 아비가 그렇게 되도록 만든 자들을 죽이는 데 쏟아 붓는다.

하지만 똑같이 유괴를 당한 하은중의 결말은 다르다. 이제는 장은중이 된 하은중은 그의 아비를 용서한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한다. 거기엔 아비들의 삶이 있다. <화이>에는 유괴한 아이를 자신과 같은 괴물이 되도록 키울 수밖에 없는, 그래서 친부를 살해하게 만든 다섯 아비들의 현실적 역사가 있다면, 드라마<스캔들>은 아름다운 동화로 마무리된다.

애증의 세월을 거쳐 이제는 화해해가던 아버지가 사실은 자신을 유괴한 사람이라는 걸 안 아이는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결국 그 아버지가 오랜 세월을 거쳐 자신을 '사랑'해온 마음에 감복한다. 은중은 말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만 않았어도'라고.

그리고 절대 해결할 수 없었던 부실 재벌의 패악의 고리를 푼 것도 '사랑'이다. 유괴범 아버지가 아들인 자신을 사랑했던 방식으로, 돌아온 아들 은중은 그에게 총을 겨누었던 아비 장태하를 돌아서게 만든다. 그리고 그 속죄의 방식으로 제우스는 무너져 내렸다.

영화 <화이>의 마지막 장면은 화이와 그의 아비 김윤석의 대결이 아니었다. 모든 아비들을 해치운 화이가 아비들에게 용역을 수주한 건설재벌 진사장을 죽이는 장면이 마지막이었다. 그가 결국 이 모든 악의 시초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를 처치함으로써, <화이>는 상징적이지만 즉자적으로 왜곡된 우리의 현대사를 청소한다.

<스캔들>의 화법은 좀 더 은유적이다. '사랑'을 논하지만, 그 사랑은 그저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피상적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장태하가 그의 아들을 되찾아 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가 사주한 살해 음모를 시인하고 감옥에 가고, 그 사건의 시발이 된 건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다.

하명근 역시 마찬가지다. 장태하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인 혈육과의 생이별을 가했지만, 그의 온 생애에 걸쳐 장태하의 아들을 사랑으로 키워내야 하는, 그래서 그 아이가 '용서와 화해'의 전도사가 될 수 있게 키워내야 하는 형벌을 스스로에게 짐 지웠다.

<화이>의 청소가 명쾌하지만 꺼림칙하다면, <스캔들>의 사랑은 이상적이지만 난해하다. 적을 내 사람으로 품어낼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의 이름으로 희생할 수 있는 한계를 묻는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왜곡되고 꼬인 현대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에 용기를 내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낸다. 더구나, <스캔들>은 혈연으로 꼬인 건설 입국의 모순을 응징과 보복도 아니고, 어설픈 혈연주의나 인지상정도 아닌, '진정한 화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드라마가 끝난 후 각자 어려운 숙제 하나를 얻어든 듯 묵직하다.

마지막 회에선 현실의 '채동욱 검찰 총장' 사건이 연상되는 사건이 등장한다. 현실의 채동욱 검찰총장은 찍어 내쳐졌지만, 드라마에서는 그 일을 설계한 사람이 용기 있게 나서 증언한다. '찍어내기' 시도는 누군가의 용기로 허사가 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다. <스캔들>이 희망이 잦아드는 시대에 독려하고픈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즉자적 현실 비판을 넘어 우리 시대의 문제 해결을 위해 작가가 피나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훌륭한 대본과 그것을 훼손하지 않은 좋은 연출에, 심지어 적재적소에서 탄성을 자아낼 만한 기막힌 OST까지, 제작진의 합이 <스캔들>의 마지막까지 담겨 있었다.

어느 한 회도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묵묵히 자기 할 말을 다한 보기 드문 드라마였다. 무엇보다 그 완주에 톡톡히 제 몫을 한 것은, 역시나 누구 한 사람까지 빠지지 않는 캐릭터에, 그 캐릭터를 멋지게 연기해 낸 배우들이 있겠다. 아버지의 세대건 아들 세대건, 심지어 곁다리로 끼어든 인간 군상들까지 누구 하나 그냥 넘어갈 연기가 없었다.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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