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곤고한 시대다. 그 말 많고 탈 많던 ‘국정원 국정조사’에서 원세훈과 김용판은 ‘증인 선서 거부’라는 초유의 행태를 연출했다. 증인이되, 진실을 말하지 않겠단 그 퍼포먼스는 당대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는 행위지만, 어찌되었건 그 둘은 그나마 그 증인 노릇을 채 하루도 하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채 이틀이 되지 않아서 이번엔 ‘가림막’이 등장했다. 증인의 얼굴을 공개할 수 없단 새누리당의 어깃장에 국정조사 현장은 또 다시 당대의 상식을 농락하는 비극적 희극의 장이 되고 말았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비본질이 본질을 압도하고, 주변부의 문제들이 중심부의 문제들을 덮어씌웠던 국정조사가 그야말로 너저분해질 대로 너저분하게 허덕거리고 있다.

▲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의 모습이 신변보호를 위해 설치된 가림막 증인석에서 그림자로 보이고 있다. (뉴스1)

시대의 곤고함을 드러낸 ‘증인 선서 거부’와 ‘가림막’ 사이에서 한국 사회는 ‘광복절 연휴’를 누렸다. 서울을 빠져나간 차량이 30여만 대에 이른다고 하고, 해운대에는 50만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공항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하고, 동해안 숙박시설은 예약률이 100%에 달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민주주의를 치명적으로 위협했다는 사건에, 그 치명적 위협의 당사자들이, ‘책임이 없다’고 강짜를 놓고, 공공연히 ‘책임질 수 없다’고 숨어들고 있지만 세상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다. 차라리 무동요의 질서라고 불러야 할것 같은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난망하지만 민주당은 그저 땀을 뻘뻘 흘리며 천막에서 최고위원회를 열고, 새누리당을 규탄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을 묻고 또 묻고 있을 뿐이다.

애를 쓰곤 있지만 민주당은 속수무책처럼 보이고, 세상은 하릴없이 그저 흘러가고 있다. 분노한 민심이 촛불로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수사’를 던지곤 하지만 그 성세는 아직 진영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있고, 진영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세상의 흐름이 강물과 같다 하니 속단하긴 이르겠지만, 이대로 가다보면 지지부진의 결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증인선거 거부 이틀 후에 가림막을 등장시키는 복장 터지는 막무가내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 이 싸움은 논리로 되는 것도, 투쟁력으로 성취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딱한 형편이다.

맞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간만에 등장한 샌드위치 연휴에는 기꺼이 일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경제적 인구들의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말하기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이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과 도움이 절대적일 텐데 이명박 정부 이후 공고해진 권력과 언론의 동류의식 혹은 종속 관계는 오늘도 그저 세상을 평온하게 재연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래서 방송 뉴스들이 뜨거운 ‘이슈’보다 뜨거운 ‘날씨’에 집착하는 것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흩트리고 있는 교란이다.

여기에 정치권력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동원해 정국을 방어하고 있다. 원세훈/김용판이 청문회에 등장한 날, 전격적으로 ‘개성공단 재개’에 합의한 박근혜 정부는 국회에 가림막이 등장한 날에는 지하벙커에 들어갔다. 계산된 우연들이다. 여성 대통령이 첫 번째 NSC(국가안보보장회의)를 그것도 벙커에서 주재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면 언론은 못 이기는 척 우르르 그리로 몰려갈 수밖에 없다. 왜 대통령이 뜬금없이 벙커에서 ‘증세 없는 복지’를 강조하고, ‘세세한 부분의 안보’를 언급하며 민주당의 장외투쟁을 비판하는지를 언론이 따져 물을 능력과 실력만 있었다면 ‘증인 선서 거부’나 ‘가림막’ 같은 초현실적인 퍼포먼스는 아예 연출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 국회에 가림막이 등장한 시간,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처음으로 청와대 지하벙커에 들어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했다. (뉴스1)

장담컨대, 오늘 자 방송 뉴스는 가림막보다 대통령의 동정을 대서특필해줄 것이고 그 전복된 뉴스가치가 무엇의 ‘가림막’으로 작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성찰’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증인이되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술하되 알려줄 수 없다는 퍼포먼스는 괜한 것도 낯선 것도 아니라 지금 아주 단단하게 한국 사회를 옭아매고 있는 어떤 질서의 부분적 형태일 뿐이다.

한국 사회가 대단히 우려스러운 내적 공백에 접어들고 있음이 노출되고 있는 때에, 우연찮게도 우리에 앞서 그런 내적 공백을 경험한 일본의 사례가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과 같은 고도화된 경제적 체계를 갖춘 국가가 어찌하여 자민당과 같은 부도덕하며 극단적인 이념집단의 지배를 받는 것인지 의아해 한다. 이런 일본의 체계는 ‘4부’라고 불리는 언론이 사실상 자민당의 지지 기반이 되어주면서 발생한 정치적 힘의 불균형이 구조화된 사회 질서로 자리매김한 상황에 상당 부분 근거한다. 자민당 체제의 유지, 존속이 곧 기득권 전체의 이익 관계에 부합하고, 이 이해관계의 핵심 수혜자인 언론이 자민당을 비판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일본 사회의 1당 지배 체제는 근 60여 년의 체계로 굳어져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으로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이들과 샌드위치 연휴를 맞아 일상을 떠다는 이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전자는 민주주의이고, 후자는 민주주의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둘을 분리하는 정치와 언론의 교활함이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민주주의의 위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둘을 잇게 하는 능력이 또 다른 세력에겐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증인 거부 선언’과 ‘가림막‘에 대한 분노를 단단한 촛불의 열기로 치환해 정치적 승리를 도모해보겠단 발상은 그래서 어쩌면 수렁속의 승리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지금 필요한 것은 연휴의 시작과 끝에 이런 얄팍한 배치를 일삼는 정권의 노림수에 대한 한 마디의 비판과 광범위한 전파일 것이다. 곤고한 시대를 건너는 힘은 추상적 구호와 고담준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질을 추동해낼 수 있는 실천에 있다. 장담컨대, 민주당이 ’광장‘이 아닌 TV앞에, 뉴스에 ’진‘을 친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아질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