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얘기 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쌀은 벼농사를 지어 얻는다. 이 벼농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살펴보면 벼농사를 언제 시작했는지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아니 1991년 경기도 고양시에서 신석기시대 볍씨가 발견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서였을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 대천리 발굴 벼껍질ⓒ옥천신문

역사학계의 발표도 그랬다. 그런데 경기도 고양시에서 신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신도시가 위치한 지역이 한강 하류 지역에 위치해 있던 만큼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을 가능성이 충분했고, 대단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에 이미 벼농사를 지은 흔적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가와지’ 지역에서 발굴됐다고 해서 ‘가와지볍씨’라는 이름을 얻은 이 유적은 기원전 3천년에서 3천5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천년 이상이 된 볍씨로 판명된 것이다.

벼농사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문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구분점이 된다. 통상 50만 년 전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구석기시대와 1만 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신석기시대에는 사람들이 주로 나무의 열매나 식물을 채집해 식량을 해결했고, 사냥과 물고기 잡이를 통해 먹는 것을 해결했다고 봤다. 이후 청동기시대에 들어서 벼농사를 하기 시작해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인데, 고양 가와지볍씨 발굴 이후로 신석기시대에도 농경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는 청원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다. 1만5천 년 전 흔적으로 판명되었다. 다만 소로리볍씨는 야생 벼였고, 야생에 있던 벼를 재배하면서 현재와 같은 재배용 벼로 진화되는데, 고양 볍씨는 이런 특성을 지닌다고 해서 이제는 신석기시대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다는 증거로 채택되게 되었다.

지난 4월29일에는 고양시 600년을 기념해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을 밝히는 세미나가 진행됐다. 사실 1991년 고양 볍씨 발굴 이후 그동안 발굴의 의미를 되새기는 후속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22년 만에 세미나를 통해 가치를 확인한 셈이 되었다. 세미나에서는 고대 볍씨 하나를 가지고 우리나라 벼농사 기원을 연구하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 분석한 결과를 내면서 가와지볍씨에 대한 연구는 제법 연구물이 축적되었다. 세미나에서 당시 발굴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고양 전 문화원장이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을 다시 쓰게 만든 고양 볍씨의 의미와 가치는 이미 22년 전에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다시 확인하는 자리를 만들기까지 22년이 걸렸다”며 감격스러워 했던 것도 이 같은 분위기에서였다.

한반도의 벼농사 기원을 알려주는 열쇠를 갖고 있는 고양 볍씨 발굴 이후 박물관 하나 없이, 시간만 흘렀다는 것이 안타깝고 억울하다는 표정의 읽혔다. 22년 세월 동안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에 대한 회한일 수도 있고, 그렇게 관심을 갖도록 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한탄하는 얘기일 수도 있었다.

# 얘기 둘

2000년 옥천에서 고고학적으로 의미 있는 발굴이 있었다. 고속철도 공사 구간 중 옥천읍 대천리를 지나는 구간에서 신석기시대 집터와 오곡 유적이 발굴된 것이었다. 주변에 별다른 유물이 나오지 않아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이곳에서 한반도 신석기 영농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유적이 발굴되었으니 대단한 성과였다.

우선 신석기시대 집터 1기가 발굴된 이곳에서는 벼와 보리, 조, 밀, 기장 등 오곡 흔적과 볍씨가 발견되었다. 이 대천리 신석기집터는 그동안 통상적인 신석기시대 집터가 둥근 움집 형태나 정사각형 형태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이후 청동기시대 집터에서 발견되는 직사각형 형태로 발견된 것이었다.

▲ 대천리 집터유적 전경ⓒ옥천신문
직사각형 집터가 청동기시대의 것만이 아니라 이미 신석기시대에도 그 형태가 있었다는 것이다. 집터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나 기타 도구 등을 보았을 때 신석기시대 집터가 맞다는 점에서 대천리 집터는 ‘대천리식 집터’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이 집터 발굴 이후 대전 관평동 등의 유적에서도 똑같은 형태의 신석기 집터가 발굴됨으로써 별도의 신석기 집터 형식으로 명명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터가 난방과 취사 등을 했던 생활공간과 농사나 채집 등을 한 곡물 등을 저장한 부속공간으로 분리하는 형태가 보인다는 것이다.

발전된 형태의 신석기시대 유적이라는 점에서 이 집터는 주목을 끌었다. 이 유적이 중요한 것은 또 있었다. 이 집터 내부에서 발견된 오곡의 흔적이다.

벼와 벼껍질, 보리, 기장, 밀, 조 등이 발견된 것으로 이들 곡물유적이 집터에서 발견됨으로써 적어도 이 시기에 농경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3천년에서 3천500년 전으로, 고양에서 발견된 볍씨의 연대와 불과 100~200년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소중한 유물로 확인되었다. 한반도 벼농사 기원과 관련한 유적으로는 고양에서 발견된 가와지볍씨에 필적할 만한 발굴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잡곡인 보리와 밀이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벼 뿐만 아니라 보리, 밀을 재배함으로써 신석기시대에 이미 벼농사 이외에도 다양한 곡물 농사를 지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유적 발굴로 신석기시대에 이미 농경을 했고, 정착생활을 함으로써 이전보다는 훨씬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음이 드러났다.

고양시가 신석기시대 볍씨 발굴 이후 볍씨를 문화자산으로 삼고, 지역 브랜드로 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기까지 22년이 걸렸다. 더욱이 고양에서는 시장이 관심을 갖고 세미나를 개최하고, 박물관을 세우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이번 세미나의 성과를 충분히 거두었다.

이제 옥천은 신석기시대 집터 발굴 이후 13년이 되었다. 신석기 집터가 발굴된 주변 지형에 대한 조사작업과 아울러 가능성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문화재를 발굴하고 옥천을 신석기시대 주요문화재 발굴지역이라는 점을 알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앞으로 추진해야 할 숙제가 많다.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없는 것까지 만들어가면서 자신들의 문화자산으로 삼으려 불을 켜고 있는데 있는 것조차 사장시킨다면 큰 문제 아닌가 말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소중한 옥천의 문화자산이 잊혀지고 사라질 수 있기에 더욱 급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세미나 한 번 없이 지내왔던 시간을 반성하고 우리 고장에 살았던 조상들의 뿌리를 다시 한 번 조명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래야만 22년 묵은 고양의 실수와 뼈아픈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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