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의 인생, 아이러니하다. 안나 카레니나(키이라 나이틀리 분) 말이다. 불륜에 빠진 오빠의 위태로운 결혼을 위해 달려가는 와중에 그만 안나 자신이 다른 남자와 불륜에 빠져드니 말이다. 불륜 카운슬링을 위해 달려간 자리에서 오빠의 불륜이 종식되는 것이 아니라 안나 자신이 불륜의 혹을 다니, 그야말로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이는 셈이 된다.

안나가, 혹은 안나와 그의 오빠인 남매가 동시에 불륜에 빠진다는 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설정은 박찬욱의 <스토커>와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 안나와 그의 오빠가 불륜에 취약하다는 설정은 <스토커>에서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 분)가 악에 전도되는 설정과 궤를 같이 하기에 충분하다.

인디아가 악에 매료되는 계기는 찰리 스토커(매튜 구드 분)가 마련한다. 인디아가 성폭행당할 위기에 처할 찰나, 그의 삼촌인 찰리는 인디아를 구하고 조카를 강간하려 한 클래스메이트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그날 인디아는 죄책감에 치를 떠는 게 아니라, 살인 현장에 동참했다는 공포감의 포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쾌감을 맛본다.

삼촌 찰리가 클래스메이트를 살인하던 날 밤 인디아가 샤워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쾌락에 몸을 떤다는 건, 그녀의 오르가즘이 육체적인 쾌락의 층위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살인의 즐거움을 오르가즘으로 덧입히는 장면임에 분명하다. 삼촌 찰리의 살인 행각을 목도한 이후 인디아가 살인 행각에 경도되어 간다는 건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에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속담 말마따나 인디아 내면에 숨어있던 살인의 희열을 하나 하나 깨우는 작업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 인디아가 살인 행각에 눈뜨는 건 그녀 자신의 악한 살인의 본성이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디아의 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유전적인 살인 성향이 각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안나가 오빠의 불륜을 바로잡기 위해 오빠 내외를 향해 달려가다가 안나 자신이 불륜에 빠진다는 관점 역시 큐피드가 사랑의 화살을 브론스키(애런 존슨 분)에게 잘못 날린 게 아니라 안나 남매의 핏줄 가운데 흐르던 유전적인 성향에 경도된 것으로도 분석이 가능하다.

브론스키와의 사랑 역시 평생 견고할 줄로만 알았다면 그건 안나의 착각이다. 그건 바로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이다. 브론스키의 아이를 가지고 그와의 사랑이 평생 갈 줄로 알았던 안나는 브론스키의 변해가는 태도와 마주하게 된다. 예전 안나를 갖기 위해 애달프도록 사랑을 노래하던 브론스키가 아니라, 안나를 귀찮아하고 성가신 존재로 생각하는 브론스키와 같이 사는 것이다.

이는 <우리도 사랑일까>와 궤를 같이 하기에 충분하디. 마고(미쉘 윌리엄스 분)는 지금 살을 맞대는 남편이 아닌 이웃집 남자 대니얼(루크 커비 분)이 평생의 짝인 줄 알고 남편을 버리고 대니얼과 사랑에 빠지건만, 대니얼은 그녀와 살을 섞은 후에는 이전과는 달리 냉담하게 마고를 대하고야 만다.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었던 걸 안나 카레니나와 마고는 몰랐던 것이다.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지금의 짝을 놓아두고 자꾸만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는데 새로운 사랑 역시 눈이 맞는 건 오래 가지 못하지 않던가. 새로운 사랑 역시 유통기한이 있다. 이는 <안나 카레니나>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한 사랑의 비극이기도 하다. 새로운 사랑이 사랑의 유통기간을 늘려 주리라 생각하는 건 바람난 이의 엄연한 착각임을 <안나 카레니나>는 시사하고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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