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일절에 들른 전주. 마침 전주 한옥마을 주변이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행진을 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삼일절 기념행사에는 외국인들도 끼어 있었고, 학생들은 물론 아이를 안고, 걸리는 부부, 나이 지긋한 어른들도 행렬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그냥 쉬는 날로만, 정치권에서 으레 치르는 행사쯤으로 여겨지게 되는 삼일절 기념식을 잊은 지 오래인 것 같아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안위는 아랑곳없이 목숨마저 버렸던 이땅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해졌다.

▲ 흥화실업은행 개막식 사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김규흥,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구 선생

# 삼일절을 지나 3월3일에는 KBS가 특별한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삼일운동의 숨겨진 대부 김규흥’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였는데, 그동안 역사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옥천 출신 한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날 방송은 선생의 고향인 옥천을 비롯해 주요 활동무대였던 중국 광동성 광주시와 상해, 북경은 물론 마지막을 지냈던 중국 천진에 이르기까지 그 파란만장한 여정을 소개했다.

김규흥 선생은 1872년 옥천읍 문정리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지역 명문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문명의 영향을 받았고, 구한말에는 대한자강회 활동을 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옥천읍에 사립 창명학교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옥천읍에서는 가장 오래된 학교가 설립되게 되었으니 그게 오늘날 죽향초등학교다. 재미있는 것은 선생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중국 상해에 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 합작은행이었던 아청은행에 예금된 고종 비자금 9천만 원을 찾으러 가려다 일제에 체포돼 6개월여 가택연금과 아울러 감시를 받는 상황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비록 미스테리같은 일이긴 하지만 아청은행에 예치했다는 고종의 비자금은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행방이 묘연해졌으나 2010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에서 보도했을 정도로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있는 얘기다.

선생은 1908년 초 중국 상해를 거쳐 광동으로 망명한다. 망명지를 광동으로 택한 것은 당시 손문을 비롯한 중국 혁명세력의 근거지가 광동 등 남부지역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한다. 선생은 이름을 김복(金復)으로 바꾸고 신분을 철저히 숨기면서 활동을 한다. 그는 손문, 진기미, 진형명 등 중국 혁명세력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신해혁명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초기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인 신규식, 박은식, 여운형 선생 등을 중국 혁명세력과 연결시켜준 거물이었다. 김규흥이 아니었으면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초기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일이다.

▲ 김규흥 사진
선생은 특히 중국 1차 신해혁명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인 1910년에 이미 광동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혁명세력과의 교유를 통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11년 1차 신해혁명에 참가, 혁명정부 도독부 참의 및 고문원을 역임했다. 이는 중국 광동성에 선생이 참의 및 고문원으로 임명되었음을 알려주는 1911년 및 1912년 관직표가 발견돼 사실로 확인된다. 이는 선생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와 사진 등을 종합해 밝혀진 사실로,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중국 신해혁명에 처음으로 참가한 한국 사람이 신규식 선생이라고 말해온 기존 학설을 뒤엎는 큰 사건이다.

김규흥 선생의 초기 독립운동 사실은 우리 역사학계의 학설을 다시 쓰고 있는 것이다. 신해혁명 첫 한국인 참가자가 신규식 선생에서 김규흥 선생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또한 신해혁명이 원세계를 비롯한 반동세력에 의해 실패한 1913년 홍콩에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발행한 한중합작언론 ‘향강’ 잡지를 통해 민주공화정을 설파했다. 이는 추후 각종 선언문이나 성명서 등은 물론 결정적으로 1919년 삼일운동의 결과물로 상해에 수립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체를 민주공화정으로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부분이다.

조선왕조가 무너진 1910년 이후 1919년까지는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왕정복고에 대한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임시정부의 국체를 민주공화정으로 확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 신해혁명의 강력한 영향력과 김규흥 선생 등 민주공화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이들의 회합, 독립운동가들의 체험 및 공부에 의한 결과였을 것이다.

1920년대에는 박용만 선생 등과 함께 1922년 북경에 북경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노력했고, 영속적인 독립운동이 되도록 하기 위해 둔전제를 주장, 한국, 중국, 러시아와의 3국 합작을 통해 시베리아지역을 차용하자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내몽골 등지에 둔전제 실시를 주장했던 그는 끝내 실행을 보지 못하고 1936년 중국 천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규흥 선생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사진이 있다. 1922년 북경에서 흥화실업은행 개막식에 상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 사진에는 김구나 신채호, 이회영, 김창숙 등 독립운동가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보이는데 이중에서도 김규흥은 상석에 위치하고 있다. 선생은 평생 독립운동을 하면서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후 단 한 번도 일제에 체포되지 않았다. 그만큼 투철하게 보이지 않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후원했다.

초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이렇듯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김규흥 선생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아니 그동안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이유 등으로 인해 소외되고, 기성 역사학계의 시야에서 멀어져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박은식, 안창호, 박용만 등 주요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하는 와중에 김복, 또는 김규흥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함에 따라 선생에 대한 연구를 안 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 방영된 김규흥 다큐멘터리는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을 기리고, 민족의식을 바로세우라는 적절한 주의환기가 되었다.

# 옥천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 제2세 교주 최시형 선생이 보은에 대도소를 두고 옥천군 청산면을 오가며 동학을 지휘했던 곳이다. 동학 교세가 그만큼 셌고, 활발했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 옥천읍, 이원면, 청산면, 군서면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어느 곳보다도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다. 일제 헌병에 끌려간 만세 지도자들을 구하려고 경찰서를 무너뜨리기도 했고, 시위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순국하기도 한 고장이다. 삼일절 기념이라야 안내면에서 최근 시작한 삼일절 면민걷기대회 정도가 고작이니, 이래가지고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제부터라도 나라를 찾는데 온 백성이 나선 기념비적인 우리의 독립정신을 되새길 민족정신을 다시 한 번 일으킬 계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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