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한 방울의 물방울도 계속 한 곳에만 떨어지면 결국에는 바위도 뚫는다고 한다. 제아무리 차가운 바위도 3년 동안 앉아있으면 따뜻해진다는 일본 속담도 있지 않은가. <제로 다크 서티>는 빈 라덴을 잡기 위한 신념의 끈을 놓지 않던 CIA 요원 마야에 관한 이야기다.

마야가 있던 곳이 테러리스트에 의해 폭발물이 터지고, 동료가 목숨을 잃는 끔찍한 상황에 직면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빈 라덴을 추적하는 마야는 판타지적 인물이다. 빈 라덴을 잡기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추격할 사람이 CIA에서 어디 마야 한 사람 뿐이었겠는가.

CIA에 근무하는 실존인물을 기초로 영화 캐릭터를 만들기는 했지만 캐스팅에 있어서는 실존인물의 외모에 근거하지 않고 반대의 캐스팅을 했다. 이들 요원이 은퇴하지 않고 현직에 종사하기 때문에 이들 실존인물의 안전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불순분자들의 표적이 되지 않게끔 고려한 캐스팅의 배려다. 마야라는 인물 역시 CIA의 실존인물을 참고로 만든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한 사람만 모델링으로 삼지는 않는다. 마야는 여러 명의 CIA 요원을 참고하여 만든 가공의 인물이다.

<제로 다크 서티>는 빈 라덴 사살이라는 결과에만 천착하여 빈 라덴을 추적하는 과정을 미화하지만은 않는다. 빈 라덴 사살이라는 합목적성을 가지고 영화를 관람하다가 불현듯 미국의 자기반성이 눈에 띈다. 날 것 그대로, 때로는 미국의 치부라 할 수 있는 ‘고문’이라는 비인간적인 심문을 탈색하지 않고 스크린 가운데로 적나라하게 소환한다.

알 카에다 요원에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만드는 물고문 시퀀스는 <남영동 1985>처럼 잔혹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빈 라덴의 근거지를 캐낼 수만 있다면 피의자를 가혹하게 다루는 고문, 혹은 하의를 벗기는 비인간적 처사를 영화는 모른 척 하지 않는다. <제로 다크 서티>는 빈 라덴의 은신처 찾기라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고문과 같은 비인간적인 과정도 있을 수 있음을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다.

캐서린 비글로우의 작품 가운데서 이러한 자기반성적 색깔이 드러나는 영화는 <제로 다크 서티>가 처음은 아닐 듯싶다. 그녀로 하여금 아카데미를 움켜지게 만든 작품인 <허트 로커>에도 자기반성의 색채는 드러나 있다.

폭발물 제거라는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하는 전장에서 탈출하고픈 한 군인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폭발물 제거라는 임무로 다시 복귀하고 마는 개미지옥 같은 여정을 그리는 <허트 로커>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전쟁에 ‘중독’되어가는, 전쟁으로 인한 인간 소외화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전쟁의 자기반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제로 다크 서티> 역시 마찬가지다. 빈 라덴 사살이라는 목적을 위해 고문이라는 비인간적인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는 걸 적나라하게 노출한다는 건, 빈 라덴 잡기라는 성과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성과를 위해 간과할 수도 있었을 부분인 고문과 같은 수단의 정당화도 발생했다는 자기반성의 끈을 영화는 놓치지 않고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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