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유독 도드라진 것은 ‘문화융성’에 대한 언급이다. ‘문화융성’은 ‘경제부흥’, ‘국민행복’과 함께 새 정부가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세 가지 방법론 중 하나로 호명되었다. 문화복지와 창작지원, 첨단 콘텐츠 산업 육성이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세부사항까지 함께 제시되었는데, 취임사만 놓고 보면 정부수립 이래 이 정도의 비중과 구체성으로 문화 정책을 거론한 대통령도 없다. 전임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한국 대중문화의 힘이 강력한 시기에 취임하게 되었고, 취임사에서 문화 부문의 언급이 큰 폭을 차지한 것은 그런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이례적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뉴스1

그러나 이러한 언급과 약속이 얼마나 지켜질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범민주당 정권 10년 동안의 문화산업의 발전과, 이명박 정부 5년 간 영화계와 방송계에서 진행된 일련의 퇴보를 지켜 보았던 사람들은 보수 정권의 문화 정책에 대해 일정 이상의 불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박 대통령이 15년 간의 정치 인생 동안 벨기에 만화 <땡땡의 대모험>에 대한 애착과 5촌 조카인 가수 은지원과의 인증샷 정도를 제외하면 문화예술계와의 접점이나 특별한 예술관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는 점도 의구심의 원인 중 하나다.

물론 모든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어하고, 특히나 취임 시기는 좋은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의욕이 가장 충만한 시기이다. 해서 박 대통령이 문화융성을 힘 주어 강조한 진의를 의심할 필요까진 없겠으나,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그가 주의해야 할 점들을 짚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과연 박근혜 정부가 ‘문화융성’을 하려면 어떤 점들을 조심해야 하는지, 굵직한 위험요소들을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짚어보자.

첫째, 이념에 따른 줄 세우기를 하지 말 것.

새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불신 중 많은 부분은 전임 정부인 이명박 정부와 집권여당 새누리당의 전력에 기인한다. 이들은 여러 차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을 ‘좌파세력이 득세한 시절’로 규정하고, 대중문화예술계의 자연스런 세대교체 또한 ‘좌파세력이 완장을 차고 문화예술계에서 정치적 견해가 다른 예술인들을 대거 축출’한 것으로 인지하는 예술관을 드러낸 바 있다.

▲ 방송인 김제동 씨가 제18대 대통령선거일인 지난해 12월 1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밀레니엄 광장에서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와 함께 '투표가 권력을 이깁니다'라는 투표참여 캠페인을 하고 있다.ⓒ뉴스1

집권자와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이를 임명하는 코드 인사가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코드 인사는 일정 부분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도 이루어졌던 것을 감안하면 이것이 반드시 이명박 전 대통령만의 과오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적으로 색깔이 맞는 이들을 요직에 앉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념이 다른 이들을 현장에서 축출하려는 시도에 있었다. 가장 도드라졌던 분야는 역시 방송인데, 윤도현, 김제동, 김미화 등의 방송인들의 석연치 않은 퇴출이나, 방송을 이끌어 가던 핵심 인력들이 현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MBC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적으로 정부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세력에 대한 정부 지원을 끊은 것 또한 이런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수많은 시민단체나 문화예술인들이 촛불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의 지원대상에서 탈락한 바 있는데, 작년 7월 <발뉴스>가 공개한 2008년 8월 27일자 청와대 내부 문건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을 보면 “의도적으로 자금을 우파 쪽으로만 배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문화예술인 전반이 우파로 전향하도록 추진”하고, "좌파집단에 대한 인적청산은 소리 없이 지속실시"하겠다는 체계적인 정치적 개입 계획이 청와대 차원에서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념에 따른 줄 세우기는 자유로운 발상과 시도가 중요한 창작자들에게 족쇄로 작용할 뿐 아니라, 문화산업계 전반에서 현장을 이끌어가는 주축세력이 된 허리층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박 대통령이 문화예술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이 전 대통령과 공유하고 있다면, 아무리 많은 예산을 확보, 집행하고 관련 법령을 제/개정한다 해도 지난 정부의 과오를 똑같이 반복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난 정부 5년을 거치면서 MBC가 얼마나 지리멸렬해 졌는지가 그 산 증거다.

▲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지난해 12월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MBC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주최하는 첫 번째 대선 후보 TV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는 가운데 MBC 노조원들이 김재철 사장 퇴진 등을 촉구하며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뉴스1

과연 새 정부는 이념에 따른 지원/배제 정책을 버리고 사태를 정상화할 수 있을까? 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파업 중이던 MBC 노조와 맺은 “파업을 풀면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던 약속을 “원론적인 이야기였을 뿐, 김재철 퇴진을 약속한 적 없다”고 뒤집은 전례를 본다면 낙관은 어렵다. 이념에 구애 받지 않는 지원과 인사가 이루어질 때만 지난 정부의 과오를 청산하고 대중문화계 전반의 지체를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을 대통령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둘째, ‘바람직한 문화’라는 이상향을 버릴 것.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최근 한국 대중문화의 성과를 두고 “대한민국의 5천 년 유·무형의 찬란한 문화유산과 정신문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평가하며 “새 정부에서는 우리 정신문화의 가치를 높이”겠다고 말했다. 다분히 국수주의적인 발언이지만, 자국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강조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는 걸 감안하면 유별난 발언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만약 ‘우리 정신문화’라는 막연한 정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정부가 자의적으로 정의하겠다는 뜻이라면 그건 심각한 문제다.

물론 박 대통령이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기반으로 성장한 정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저속한 가사’, ‘시의 부적절’, ‘창법 미숙’ 등의 웃지 못할 핑계로 총 222곡의 대중가요를 금지시켰던 아버지의 전례를 고스란히 답습할 것이라 지레 걱정하는 것은 근거가 다소 빈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여당의 실질적 1인자였던 지난 5년 간 한국의 대중문화계 전반에 심의를 통한 실질적 검열이 대폭 강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 대통령이 생각하는 ‘5천 년 유·무형의 찬란한 문화유산과 우리 정신문화’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 만 16세 미만 청소년의 심야시간 게임이용을 제한하는 '셧다운제'가 첫 시행된 지난 2011년 11월 20일 청소년단체 '맑은i 밝은i 청소년 사이버패트롤' 회원들이 서울 종각역에서 청소년의 건전한 인터넷 사용을 장려하는 플래시몹 댄스를 벌이고 있다.ⓒ뉴스1

한류 수출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는 게임은 지난 정부에서 학교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게임물등급심의위원회의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가, 셧다운제라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기형적인 제도의 희생양이 되었다. 방송 프로그램의 규제 또한 강화되었다. 동시대 한국의 대표적인 예능프로그램 MBC <무한도전>의 경우 ‘품위 유지’ 사유만 쳐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3년 남짓 동안 7회 이상의 잦은 제재를 받아, 욕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품위 유지’를 이유로 출연자들의 별명을 부르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K-POP으로 대표되는 대중가요 또한 마찬가지다. 가사에 ‘술’이나 ‘담배’ 등의 단어가 들어간 노래들은 청자에게 술이나 담배를 권한다는 이유로 대거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되어 방송 금지를 당했다.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곡 ‘졸업’은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지”라는 대목이 성교를,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에서 ‘팔려가는’이란 가사가 매매춘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 대상이 되어 화제가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기준이 일관성이 없고 지극히 자의적이란 점이다. ‘강남스타일’로 싸이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그의 곡 ‘Right Now’의 뮤직 비디오가 동영상 사이트 유투브에서 세계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자, 여성가족부 산하 음반심의분과위원회는 ‘Right Now’의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 철회를 위해 급하게 재심의를 소집했다. “인생은 독한 술이고”라는 가사가 술을 권한다는 이유로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되었던 ‘Right Now’는, ‘국위선양’을 위해 손바닥 뒤집듯 방송 가능 곡으로 해금되었다. 그 한 곡만 철회하기가 민망했던지, 여성가족부는 그간 열심히 지정했던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곡 250곡을 동시에 철회했다.

▲ 가수 싸이가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식전공연을 하고 있다.ⓒ뉴스1

지난 정부에서 시도한 과도하고 자의적인 심의 규정 적용이 한국의 대중문화 발전에 가져온 지체가 새 정부에서도 계속 된다면, ‘문화융성’은 그저 구호에만 그칠 공산이 크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지난 5년 간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움직임에 대해 어떠한 책임 있는 자세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혹시 ‘바람직한 문화’라는 자의적인 이상향을 머리 속에 견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셋째, 새로운 걸 시작하기 전에, 기존에 왜곡된 시장구조부터 개혁하라.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낸 공약집을 통해 문화예술지원 확대와 예술인복지법 개정을 통한 사회보장 확대, 인디밴드 및 뮤지션 창작지원 강화와 공연·영상분야 스탭 처우 개선, 문화예술단체 최저임금보장, 독립·예술·다양성 영화 제작지원 및 전용관 확대 등을 약속한 바 있다. 물론 이런 공약들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에 왜곡되어 있던 시장구조를 먼저 개혁하지 않으면, 예산은 예산대로 투입하고 그 결과는 얻지 못하는 사태를 직면하게 될 지도 모른다.

가장 단적인 예로 음악계 관련 공약만 예를 봐도 알 수 있다. 공약집은 인디밴드 및 뮤지션 창작지원 등의 신규 사업에 대해서는 열심히 언급하지만, ‘문화 콘텐츠 공정거래 환경 조성’이라는 소제목 아래에는 공정거래 환경 조성이 중요하다는 진단 외에는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인디밴드 및 뮤지션들의 창작욕을 가장 심각하게 저해하는 것은 수익의 대부분을 통신사와 유통사가 가져가는 왜곡된 음원 요율 계약이라는 점을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정부가 강력한 이익집단인 통신사들을 설득해 공정거래 환경을 조성할 만한 힘이 없거나, 설령 힘이 있다 하더라도 시장에 개입할 의사가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 구조를 먼저 해결하지 못하고 제작 지원을 한다 한들, 대부분의 돈은 다시 통신사와 유통사의 수중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민간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이상 해결이 어려운 문제는 공연·영상분야 스탭 처우 개선 항목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문화예술계의 많은 부분은 스탭들의 살인적인 저임금에 기대어 지탱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예산 투입을 통해 처우 개선을 유도한다고 해서 해결이 가능한 문제로 보기 어렵다. 관련 업계와의 논의와 법령 재정비, 표준 계약서 도입, 예산 투입과 지속적인 행정 지도 및 단속이 함께 필요한 부분인데, 새 정부가 얼마나 문제의 복잡성을 인지하고 있는지, 얼마나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공연장 허가 기준으로 인해 홍대 클럽 중 정식 공연장 허가가 난 곳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점은 공연문화를 방해하는 대표적인 행정 요인이지만, 이런 기초적인 어려움에 대한 파악도 공약집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보면 새 정부가 어디까지 문제를 인지하고 있는지 장담하기 어렵다.

▲ 지난해 7월 27일 오후 경기도 이천시 지산포레스트리조트에서 열린 '2012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에서 관객들이 공연을 즐기고 있다.ⓒ뉴스1

이렇게 시장 개입을 망설이는 지점은 영화 관련 공약인 독립·예술·다양성 영화 제작지원 및 전용관 확대 항목에서도 발견된다. 그간 독립영화들이 전용관이 없었기 때문에 스크린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아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영화 전용관 체인 ‘인디플러스’가 존재하는 데도 독립영화가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대기업들의 무분별한 멀티플렉스 확장과 스크린 독과점을 규제하지 않고 내버려 둔 탓에, 있던 독립영화 전용관조차 경영악화로 문을 닫는 왜곡된 시장구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굳이 선후관계를 따지자면, 지원 확대 이전에 대기업들의 독과점 경영을 견제하고 영화계의 종적 다양성을 확보할 만한 제도적 안전장치를 먼저 마련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어 종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특히나 이 문제는 비단 이명박 정부 5년 간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김대중 전 대통령 집권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문제이다. 하여 박 대통령이 진정 ‘문화융성’에 뜻이 있다면, 후보 시절 밝혔던 공약보다 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시장에 개입해 왜곡된 시장구조를 해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과연 새 정부는 그럴 의지가 있을까. ‘문화융성’, 말은 쉽지만 들여다보면 마냥 쉽지만은 않은 과제다. 이미 취임사는 낭독되었으니, 이제 새 정부가 얼마나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해 나갈 수 있는지 지켜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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