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악역’은 출생의 비밀만큼이나 자주 애용되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더군다나 악녀는 악인 가운데 남자보다 애용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간혹 <넝굴당>처럼 악역이 씨가 마른 청정 드라마도 있긴 하다. 하지만 대개는 악역이 드라마에 미치는 악영향 때문에 주인공이 빛을 보는 경우가 많기에 우리나라 드라마는 악역을 애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요즘 안방극장 속 악녀를 살펴보되 <청담동 앨리스>의 신인화(김유리 분), <대왕의 꿈> 속 승만왕후(이영아 분) 같은 악녀는 논외로 하겠다. 이들은 기존 드라마의 전형적인 악녀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캐릭터기에 그렇다. 기존 악녀의 공식과는 차별되는 악녀들만 살펴보았다.

악녀가 불효녀를 벌하는 경우 - <내 딸 서영이>의 정선우

<내 딸 서영이>의 정선우(장희진 분)는 과거 강우재(이상윤 분)를 사이에 놓고 사랑의 경합을 벌이던 강우재의 아내 이서영(이보영 분)을 자신이 근무하는 로펌으로 근무하게끔 만든다. 연적을 자기 직장으로 끌어들이는 지점만큼은 정선우를 쿨한 여자로 비치게 한다.

헌데 정선우는 연적을 자기 직장으로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생각만큼 쿨한 여자가 아니다. 강우재를 사랑하던 옛 감정을 아직도 정리하지 못해서다. 유부남인 강우재만큼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남자친구와의 연애도 순탄하지 못하고 헤어지기 일쑤다.

이런 정선우에게 호재가 생긴다. 연적 이서영이 시댁에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었다고 거짓말하고 결혼한 이서영의 과거를 알게 되고, 이를 이서영의 시어머니인 차지선(김혜옥 분)에게 일러바친다. 강기범(최정우 분)과 차지선이 이혼하네 마네하는 시부모의 갈등이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강우재와 이서영의 결혼생활에 심각한 먹구름이 들이닥친다.

시부모의 입장에서 이서영은 불효녀다.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었다고 거짓말한다는 건 시댁 어른의 입장에서는 패륜에 해당하기에 이서영은 변형된 악녀다. 패륜을 저지른 불효녀이기는 하지만, 이서영이 시청자에게 돌팔매를 맞지 않는 건 그녀가 아버지를 저버린 이유가 시청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됐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가족 중 자신이 갚아야 할 부채를 다른 가족에게 연대 보증으로 떠넘겨 가족 전체를 힘들게 만든 경험이 있는 시청자라면 아버지를 부정하는 서영이의 입장을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이런 불효녀를 벌주는 건 옛 연적인 정선우다. 정선우가 이서영의 과거를 파헤친 결과를 혼자만 아는 게 아니라 시어머니에게 일러바침으로 불효녀는 벌을 받는다. <내 딸 서영이>의 정선우는 옛 연적이 불효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를 고자질하는 것으로 해코지를 하는 악녀의 사례에 해당한다. 악녀가 불효녀에게 벌을 주는 셈이다.

막장 시월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백년의 유산>의 방영자

방영자(박원숙 분)는 막장 시어머니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악녀다. 없는 집 딸 민채원(유진 분)이 아들에게 시집온 게 꼴 보기 싫어서 신혼의 단꿈에 설레는 새색시에게 아들의 ‘장난감’이라고 비아냥거리며 조롱한다. 며느리의 신용카드를 잘라버리는 건 예사고, 며느리에게 남편에게 어울릴 새 아내로 누가 어울리겠냐며 세 아가씨의 사진을 들이민다.

급기야는 며느리를 정신병자로 몰아 정신병원에 강제 구금한다. ‘며느리 잔혹사’의 극치를 달리는 막가파 시어머니다. 보다 못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이건 경우가 아니다, 아내를 정신병원에서 꺼내 달라 요구해도 방영자는 아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한다.

심지어 기억상실에 걸린 며느리 민채원에게 이세윤(이정진 분)이 남편 몰래 만난 애인이라고 거짓말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며느리를 학대하는 악녀는 진화한다. 며느리가 못마땅해서 달달 볶던 기존 막장 시어머니는 옛말이다. 며느리를 불법으로 감금하고 남편 아닌 다른 남자와 놀아난 불륜녀로 만드는 거짓말을 서슴없이 하는 패륜을 자행한다.

신분 상승의 욕망과 맞닿는 악녀 - <청담동 앨리스>와 <야왕>, <학교 2013>

요즈음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찾을 수 있는 악녀의 유형으로, 신분 상승의 욕망과 맞닿는 악녀를 손꼽을 수 있다. <청담동 앨리스> 속 서윤주(소이현 분)가 시집 잘 가 청담동 마나님으로만 등극했다면 그녀를 악녀로 매도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서윤주는 차승조(박시후 분)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적이 있다. 서윤주를 위해 차승조는 자신의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았지만 서윤주는 차승조의 구애를 매섭게 거절한다. 아무 것도 없는 남자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 스펙이 되지 않아서다.

자신을 위해 부귀를 내려놓은 차승조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매몰차게 거절한다. 차승조에게 남은 건 서윤주의 사랑이 아닌 정신적 장애다. 서윤주가 시누이 신인화 못지않은 악녀가 된 건 사랑하는 남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정신적 후유증을 남기는 된장녀이기 때문이다.

사람보다 돈을 쫓는 건 <야왕>도 <청담동 앨리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 않는다. 주다해(수애 분)는 외조를 받는 아내다. 그런데 그 외조의 과정이 조금은 특별하다. 주다해의 남편 하류(권상우 분)는 가진 것이 없다. 아내가 해달라고 하는 건 다 해주고 싶지만 가진 게 없기에 몸으로 돈을 벌어 아내가 바라는 걸 외조하는 지극정성의 남편이다.

하지만 주다해는 이런 남편의 애틋한 외조와는 달리 남편을 배신한다. 남편이 호스트바에서 험하게 몸을 굴리며 번 돈으로 유학을 떠나서는 백도훈(동방신기 유노윤호 분)과 사랑을 시작한다.

한국에서 뒷바라지하는 가난한 남편과 딸은 뒷전인 채 돈 많은 남자와 이국 땅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셈이다. <청담동 앨리스>의 서윤주와 <야왕>의 주다해는 돈을 위해서라면 자기를 사랑했던 남자를 헌신짝처럼 차버리거나 이용하는 작태를 보여준다.

주다해와 서윤주의 연장선이 되는 악녀는 <학교 2013>에서 찾을 수 있다. 길은혜는 도발을 불러일으키는 학생이다. 송하경(박세영 분)을 다치게 만든 원인제공자도, 이지훈을 휴대폰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세운 것도 길은혜의 작품이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악녀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길은혜의 장래희망에서 남경민과는 차별되는 악녀의 면모를 보여준다. 길은혜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 한다. 시집을 잘 갈 수 있는 직종이라 그렇단다. 남편 잘 만나 시집 잘 가는 건 자신의 노력으로 부를 이루겠다는 성취의 영역이 아니다. 신분상승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다는 걸 의미한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취집’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이다.

이 점에 있어서 길은혜는 주다해, 혹은 서윤주와 궤를 같이 한다. <청담동 앨리스>와 <야왕>, <학교 2013>의 악녀들은 이렇게 부잣집 남자 하나 잘 물어 신분을 높이고자 하는 악녀의 욕망이 투영되고 있다.

가난은 싫고, 그렇다고 노력으로 자수성가하기에는 가난을 벗어나는 과정이 요원하다. 다른 남자의 희생을 발판 삼아 부잣집 며느리로 입성하겠다는 악녀들의 야심을 시청자는 <청담동 앨리스>와 <야왕>, <학교 2013>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이 세 드라마에서는 ‘취집’의 부정적인 측면을 관찰할 수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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