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뮤지컬은 관객으로 하여금 사랑이나 판타지를 꿈꾸게끔 만드는 소재를 즐겨 애용한다. <셜록홈즈>와 같은 추리극이나 <넥스트 투 노멀>같은 심각한 가족극은 뮤지컬의 소재로 활용하기를 꺼리는 게 사실이다. 관객의 판타지에 생채기를 낼까, 혹은 넘버와 장르의 충돌이 일어날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레베카>는 기존 뮤지컬이 꺼리는 장르에 도전한다. 뮤지컬과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미스터리 스릴러를 소재로 채택하기에 그렇다.

<레베카>는 ‘원 소스 멀티 유즈’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가 저술한 원작을 스릴러의 대가 히치콕이 2년 후에 영화로 만들고, 미하일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가 이를 다시 뮤지컬 작품으로 만든 작품이기에 그렇다.

뮤지컬 <레베카>는 스릴러를 다루되 초반에는 스릴러에 어울리지 않는 문법을 택한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초반에 집어넣는다. 극작가 미하일 쿤체는 극본을 쓸 때 ‘해설자’를 삽입하는 걸 즐겨하는 경향이 있다. <엘리자벳>의 ‘루케니’처럼, <레베카>의 여자 주인공은 ‘나’로 처리된다. 귀부인의 말동무로 밥벌이를 하던 ‘나’가 부잣집 남성인 막심을 만나 한순간에 인생이 피는 건 요즘 드라마에서 흔하게 보는 신데렐라와 다름 아니다.

하지만 부잣집 마나님이 되는 걸로 인생이 피는 줄로만 알던 ‘나’의 결혼이 반드시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동화책의 흔한 결말, ‘그 후로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의 결혼 후 생활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레베카>는 막심과 ‘나’의 평탄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묘사한다.

뮤지컬 <레베카>는 연극 <키사라기 미키짱>과 궤를 같이 하기도 한다. 연극에서 오타쿠들이 추종하는 아이돌은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뮤지컬의 레베카 역시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키사라기 미키짱>과 마찬가지로 고인이기에 그렇다.

‘나’는 세상에는 없는 마나님 레베카의 그늘에 짓눌려 산다. 결혼 전에는 ‘나’만 둘도 없이 사랑해줄 것 만 같던 남편이나 집사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와 관련된 사안이나 이야기만 나오면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인다.

레베카를 추앙하는 댄버스 부인의 위세에 눌려 ‘나’는 평탄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정신분석의 관점으로 보면 주인공인 ‘나’를 짓누르는 레베카는 ‘아버지의 이름’이나 마찬가지다. 레베카는 죽었지만, 막심의 실질적인 마나님은 살아있는 막심의 아내인 ‘나’가 아니라 죽은 레베카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넘버는 <황태자 루돌프>처럼 맛깔난다. 프레스콜 당시 오만석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손꼽은 넘버 ‘레베카’는 단 한 번만 들어도 흥얼거릴 정도로 단순한 멜로디임에도 가슴을 파고드는 감성적 진폭의 힘이 강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은 ‘낙제점’에 가깝다. <인랜드 엠파이어>처럼 서사 구조를 헝클어 놓을 목적이 아니라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개연성 부여는 필수적인 요소다. 그럼에도 <레베카>는 이를 간과한다. 댄버스 부인이 살아있는 막심의 부인인 ‘나’를 그토록 무시하고 죽은 레베카를 신처럼 떠받드는 것에 대한 설명은 부재하다.

<레베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반전’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이 반전을 나이트 샤말란이 울고 갈 정도로 기가 막히게 표현한다. 하지만 뮤지컬은 원작의 가장 매력적인 요소인 반전을 너무나도 사소하게 처리하는 오류를 범한다. 원작의 반전이 갖는 매력을 뮤지컬은 ‘사랑 지상주의’로 끝을 맺고자 하지만 원작의 반전이 주는 매력에는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소설이나 영화 원작을 모르는 관객이 관람 전에 프로그램 북을 보는 건 권하지 않는다. 프로그램 북에는 버젓이 뮤지컬의 반전이 대놓고 기술되어 있어서다. 뮤지컬 넘버는 80점이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은 개연성 부재로 말미암아 낙제점인 50점에 가깝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사안이 있다. <엘리자벳>의 ‘토드’는 ‘토트’로 표기해야 옳다. 오스트리아가 독어 문화권에 속하기에 'd'를 ‘드’가 아닌 ‘트’로 발음해야 한다. 이번 <레베카>는 <엘리자벳>과는 반대의 표기 오류가 나타난다. ‘막심’이 아닌 영어식 발음인 ‘맥심’으로 표기해야 하건만 이번에는 막심으로 잘못 표기한다. 어느 문화권에 속하느냐에 따라 오스트리아식 표기를 따르느냐 영미식 표현을 따르느냐 하는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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