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독일인 작가 산드라(산드라 휠러)와 프랑스인 대학교수 사뮈엘(사뮈엘 테이스). 두 사람은 아들 다니엘(밀로 디차도 그리너), 강아지 스눕과 함께 프랑스 산간 지방의 외딴곳에 살고 있다. 어느 날 산드라를 인터뷰하러 문학 전공생이 찾아오는데 사뮈엘이 음악을 큰 소리로 틀어댄다. 결국 인터뷰는 중단되고 산드라와 사뮈엘은 갈등을 빚는다. 그리고 다니엘이 잠깐 산책을 나간 사이 사뮈엘이 죽은 채 발견된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의심스러운 정황에서 산드라는 용의자로 기소된다.

<추락의 해부>는 결핍을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는 어두운 화면에 대화 소리만 들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윽고 화면이 밝아지면 조에와 인터뷰하는 산드라의 모습이 보인다. 산드라는 위층에 남편 사뮈엘이 있다고 말하지만 남편의 얼굴이나 말소리 대신 점점 볼륨이 커지는 음악 소리만 그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준다. 아들은 4살 때 오토바이에 치여 시각장애를 얻었다. 사뮈엘의 죽음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조차 아들이 잠시 집을 떠나 강아지 스눕과 산책을 나간 사이에 발생한다.

핏자국의 위치와 각도, 남편의 흉터 등 법정에 제출된 증거와 전문가들의 분석 또한 스모킹 건은 아니다. 산드라가 쓴 소설이 그녀의 자전적 경험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점이 검사에 의해 밝혀지고, 이후 사뮈엘의 USB에서 사건 하루 전날 산드라와 싸움이 담긴 녹취파일이 등장하지만 부부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는 정황만 밝힐 뿐 결정적 증거로 사용되기에는 미흡하다. 결국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도 진실에는 도달할 수 없다. 이쯤 되면 통쾌하게 진실을 밝히는 법정 영화란 기대는 접는 게 낫다.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이미지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이미지

치밀한 거리두기로 제시하는 해부의 용례 

하지만 <추락의 해부>는 범인 찾기에서 오는 쾌감과 다른, 짙은 여운을 선사하기 위해 치밀한 설계도를 펼쳐낸다. 설계도는 관객을 의도적으로 미궁에 빠뜨리고 혼란을 주기 위한 괘씸한 목적이 아니라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충실히 재현하기 위함이다. 열린 결말과 다른 의도적 모호함의 추구를 통해 관객은 ‘남편을 살해한 아내’라는 자극적인 가십거리를 소모하는 방청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한 명의 배심원으로 진지하게 법정에 초대받는다.

<추락의 해부>에서 주인공은 누구인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는 산드라인가, 믿기 싫은 비극적 상황에 놓인 다니엘인가. 영화가 끝나도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려운 까닭은 과감한 연출로 사건을 바라보는 시점을 흔드는 까닭이다. 카메라는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줌과 패닝, 푸티지 영상에서 갑자기 현장으로 디졸브 되는 레이어의 활용 등. 한 사람의 시점에서 몰입하기보다 지속적인 소격효과 통해 제3자의 입장에서 조망하길 바라는 감독의 의도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프랑스에서 생활하는 독일 여자라는 산드라의 배경도 흥미롭다. 각자의 모국어가 독일어와 프랑스어인 두 사람은 결국 가정의 공용어로 영어를 채택한다. 이는 다른 나라의 언어로 표현됐지만 남녀의 언어 차이일 수도, 요즘 유행하는 MBTI로 치환한다면 T와 F의 대화법에서 오는 갈등일 수도 있다. 심지어 재판 중에 산드라는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이고 영어의 쓰임도 제한받으며 자기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조차 실패한다. 타인은 물론 자신과도 완벽한 소통의 근원적 불가능성에 대한 은유들이 이처럼 영화 깊숙이 자리한다.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이미지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이미지

소통의 불가능성 위에서 배심원 위치에 놓인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습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본인만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조건에 놓인다. 아들을 다치게 한 죄책감, 작가로서의 절망감이 사뮈엘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것일까. 타지 생활의 답답함과 결혼생활에 지친 산드라가 끔찍한 결단을 한 것일까. 극의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의 소재는 늘어가지만 혼란스러움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가중된다. 배심원의 입장에서 결론을 내야 하지만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찝찝함, 결정의 무게감에 짓눌리는 체험의 영역으로 영화는 진입한다.

플래시백을 쓰는 타이밍과 연출법은 <추락의 해부>의 백미다. 플래시백은 영화에서 결정적인 두 장면에 쓰인다. 첫 번째는 산드라와 사뮈엘의 부부싸움 씬이다. 배심원에게는 녹음된 소리와 지문만 주어진다. 감독이 화면과 음성을 함께 연출한 플래시백에서 볼 수 있는 표정이나 제스처, 두 사람의 동선 등의 세세한 정보를 배심원은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영화 내의 배심원과 영화 밖의 관객 사이에 정보격차가 발생한다. 이 역시 소통의 실패다.

두 번째 플래시백은 다니엘의 증언 장면이다. 아스피린을 과다복용한 뒤 사뮈엘이 다니엘에게 했던 이야기다. 이때 사뮈엘의 목소리는 다니엘의 독백으로 대체된다. 진실의 파편이 담긴 음성녹음이 아니라 허구의 가능성도 있는 증언의 순간에 플래시백이 쓰인다. 이제 영화 밖의 관객은 법원도 믿을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의 선택 아래 산드라의 유무죄를 판단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에 휩싸인다.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이미지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이미지

대체할 수 없는 스눕의 자리

1년여 간의 재판 끝에 산드라는 결국 무죄 판결을 받는다. 길고 긴 여정 끝에 산드라와 다니엘은 각자 다른 걸 손에 쥐었다. 산드라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복귀의 여정을 거쳐 일상이라는 보잘것없는 전리품을 얻는다. 다니엘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한 성장 끝에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던 정답지를 손에 쥔다. 크고 외딴집에 남은 두 사람이 누운 각자의 자리는 마취가 풀릴 때까지 환자가 누워 회복을 기다리는 회복실 침대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강아지 스눕이 이불과 베개도 없이 누워있는 산드라의 옆에 엎드린다. 사뮈엘이 있어야 할 위층에서 대신 모습을 드러내고 공을 물고 다시 올라간 것도 스눕. 사뮈엘이 아스피린을 과다복용하고 토사물을 남긴 채 쓰러졌던 것처럼, 다니엘에 의해 아스피린을 복용하고 위험한 상태에 놓였다가 구토와 함께 깨어난 것도 스눕이다. 그동안 마치 아버지처럼 다니엘의 눈이 되어 앞서서 발을 내딛고 듬직하게 옆자리를 지켜왔지만 산드라와는 별다른 교감이 없어 보였던 스눕.

마지막까지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우직하게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본 유일한 캐릭터. 산드라는 그런 스눕을 끌어안고 조용히 눈을 감고 서서히 화면이 어두워진다. 대중들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해부된 산드라와 다니엘. 두 사람의 영혼의 조각이 흉터 없이 봉합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강아지의 선한 눈빛과 따뜻한 온기 안에서라면 그 상처가 덧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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