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이달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각별한 건 원작 만화 <슬램덩크> 완결 이후 26년 만의 귀환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몇 차례 극장판과 티브이 애니메이션이 발표되긴 했지만, 이번 작품은 원작자 다케히코 이노우에가 연출과 각본을 맡으며 직접 총괄했다. <슬램덩크>의 시간은 26년 전에 멈췄다. 같은 시대에 연재된 <드래곤볼>이 무수한 외전과 파생 작품을 낳았고 아직도 <드래곤볼 슈퍼>가 연재되고 있는 무한한 공전의 이야기라면, <슬램덩크>는 가장 빛나게 타오른 순간 덧없이 막을 내린 유한한 청춘의 이야기다. 북산고의 여름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무대이자 원작의 대미를 맺는 산왕 전 승리 후 찍은 기념사진 속에 봉인돼 있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듯, “이 사진이 표지로 쓰이는 일은 없었다”.

만화 ‘슬램덩크’ 오리지널 31편 표지 이미지
만화 ‘슬램덩크’ 오리지널 31편 표지 이미지

<슬램덩크>는 한국에서도 오랜 시간 꾸준히 회고되어 왔다. 이번 극장판 개봉 후에도 자칭 ‘슬램덩크 세대’들이 원작에 관한 추억과 토론을 쏟아내고 있다. 그중 많은 이야기가 결말 이후의 <슬램덩크>에 대한 가정이다. 전국최강 산왕공고에게 기적처럼 승리했지만, 직후의 경기에서 “거짓말처럼” 탈락했다는 전언으로 끝난 미완의 결말이다. 원작 팬 중에도 이 결말을 이야기가 다급히 정리돼 버린 결함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작품의 내적 논리상 예고되었던 결말이며, 통속적 결말에서 벗어나 만화를 계속해서 회고하게 만드는 여운을 준다.

일반적인 소년 만화와 스포츠 만화는 ‘최종 보스’가 있는 마지막 스테이지로 향하는 여정이다. 반면 북산고는 산왕공고와 대회 2회전에서 붙었다. 북산이 승리한다고 해도 그 이후의 경기는 목적과 긴장감을 상실하는 잉여가 된다. 토너먼트 대진표는 전국대회 편 초반에 공개되었다. 즉, 전국대회 편이 시작된 순간부터 산왕 전은 사실상의 결승전으로 공표된 것이다. 탈락 시기가 작중 클라이맥스인 산왕 전 직후이고, 저 유명한 “하지만 이 사진이 표지로 쓰이는 일은 없었다”는 후일담의 형식으로 비보가 전해지기에 승리의 여운과 실패의 허망함이 뒤섞여 형언하기 힘든 기분을 일으킨다. 한나의 대사를 빌리면, 4개월 동안 일어난 그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더 퍼스트 슬램덩크〉포스터
영화〈더 퍼스트 슬램덩크〉포스터

<슬램덩크>가 연재되던 시기 일본에서 농구는 비인기 종목이었다. 고시엔으로 불리는 전국대회가 있는 메이저 종목 고교야구에 비하면, ‘전국 제패’ 같은 말도 만화적 클리셰 이상의 무게감을 줄 수가 없었다. 타케히코 이노우에는 농구 애호가로서 스포츠 만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상업성을 고려해 학원물과 섞어서 그려야 했다. 첫 회에 채소연이 강백호에게 건네는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곧 작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구애의 질문이었다. 이야기 중반 정대만의 명대사 “농구가 하고 싶어요”는 순수한 스포츠 장르 만화를 그리기로 결심한 작가의 고백처럼 느껴진다. 산왕 전에서 강백호가 불현듯 뱉는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는 풋내기 강백호를 지켜보며 농구란 스포츠에 감응하게 된 독자들을 대신해 첫 회의 질문에 내놓는 대답과 같다.

채치수는 전국제패를 좌우명처럼 들먹이지만, 도내에서도 만년 약체팀인 북산의 현실로선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다. 그가 몽상을 통해 정말로 쫓아왔던 건 서클 활동의 소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되는 목표로서의 농구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북산에서의 마지막 여름에 이르러 그 꿈을 함께 꿀 수 있는 동료들을 얻었고, 어린 시절 상상하던 전국대회 결승전의 모습대로 산왕과 맞붙게 되었다. 그 꿈의 연장선에서 산왕과의 경기는 2회전이 아니라 상상이 실현되는 ‘결승전’이었다.

영화〈더 퍼스트 슬램덩크〉스틸 이미지
영화〈더 퍼스트 슬램덩크〉스틸 이미지

정대만과 서태웅 역시 어떤 위업을 이루기 위해 농구를 하지 않았다. “농구가 하고 싶다”는 깊은 갈망을 풀기 위해, ‘농구를 더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은 욕구에 대한 당면 목표로서 일본 최고의 선수가 되려고 한 것이다. 산왕 전은 정대만이 공백기를 극복하며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서태웅이 일본 최고의 선수 정우성과 겨루며 껍질을 깨는 무대다. 다케히코 이노우에가 극장판에 관해 인터뷰하며 말한 대로 원작에서 송태섭에 관해 설명이 부족했다면, 단순히 드라마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과 달리 ‘농구’에 대한 마음, ‘농구’와 맺고 있는 관계가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램덩크>는 불량학생 강백호가 바스켓 맨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정말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과정이 산왕 전까지의 줄거리다. 이렇게 연결되는 플롯 안에서 <슬램덩크>는 미완의 결말이 아닌 완전한 결말을 이루었다. 다른 만화들이 패배를 딛고 승리를 얻는 결말을 장식한다면, <슬램덩크>는 승리를 이뤄낸 후 패배를 전한다. 그들의 여름은 생애 단 한 번 찾아오는 신기루로 남았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건 무언가에 빠져드는 마음만으로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영광의 시절’이다. 청춘은 미망의 회고담이며 위대한 실패담이다. 이 실패담을 통해 <슬램덩크>는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영속하는 청춘의 알레고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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