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윤리헌장실천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언론윤리 TALK>은 취재보도 활동에서 발생하는 윤리 문제를 주제로 언론인에게 드리는 편지 형식의 글입니다. 학계와 시민사회, 언론계에서 언론윤리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온 필진이 돌아가며 격주로 집필,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에서 발행하는 [언론인권통신]에 게재합니다. 동의를 구해 미디어스에 게재합니다. 

[미디어스= 정은령 칼럼] 여기 초등학생 딸 하나를 둔 가족이 있습니다. 남편은 운영하던 업체의 문을 닫았고, 아내는 남편이 폐업하던 무렵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부부에게는 1억여 원의 카드빚이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가상화폐에 투자해 2000만 원의 손실을 봤습니다. 아내는 최근 들어 병원에서 수면제를 처방받아 복용했습니다.

이제는 전 국민이 다 알게 된 조유나 양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제주도에서 한 달간 농촌 살기 체험을 한다고 떠난 아이가 실종되었다는 첫 보도가 나온 후 완도 앞바다에서 일가족이 숨진 채 발견되기까지 연일 실종 이유에 대해 갖은 추론들이 부스러기 같은 단서들을 근거로 쏟아졌습니다. CCTV에 촬영된 가족의 모습 하나를 두고도 엄마의 등에 축 늘어져 업힌 아이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는 주장부터, 왜 힘센 아버지가 아이를 안지 않고 엄마가 아이를 업었는지, 아버지의 왼손에 들린 것은 무엇인지 그럴듯한 해석이 보태졌습니다.

연일 계속된 보도가 잠잠해진 것은 가족이 한 줌 재로 돌아간 뒤였습니다. 유족 누구도 얼굴을 비추지 않은 화장장 풍경이 '유나양 마지막 길, 유족은 오지 않았다' '쓸쓸한 마지막 길' '장례식 없이 화장' 등의 제목으로 보도됐습니다.

그러나 유나양 가족이 '쓸쓸한 마지막 길'을 가게 된 것은

언론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남에게는 밝히고 싶지 않았을 한 가족의 내밀한 사정들이 언론 보도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졌습니다. 장례를 치르거나, 화장장에 나타나면, 카메라 앞에 노출되고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어떤 유족이 나서고 싶었을까요.

조유나 양 가족 사망 사건을 다룬 보도들은 단독 보도 경쟁 앞에서 인권 보호라는 기본적인 윤리가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해준 사례입니다. 2021년 한강 실종 대학생 사망 보도 이후, 사망 원인이나 부검 결과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 스스로 페이지뷰를 좇아 성급한 보도, 설익은 의혹을 양산했다는 자성이 쏟아졌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실종 차량 조사하는 경찰 Ⓒ연합뉴스
실종 차량 조사하는 경찰 Ⓒ연합뉴스

조유나 양 가족의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추정하는 대로 자살일 가능성이 있다면 부모에 의한 아동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자살로 추정되는 정황이 있다면 현장에 있는 기자들과, 그들의 기사를 걸러 최종적으로 보도하는 데스크들은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경찰이 공개수사를 했기 때문에 희생 아동의 이름과 얼굴이 밝혀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요.

한국기자협회가 채택하고 있는 <자살보도 권고기준 3.0>에 따르면, 자살로 명확히 판정되기 전까지 사인을 자살로 추정하거나 단정하는 보도는 삼가야 합니다. 경찰이나 소방 등 관련 기관의 발표라도 신중하게 보도해야 합니다. 고인의 인격과 유가족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살 동기를 단순화한 보도는 삼가야 합니다. 자살을 했다 하더라도 그 원인은 단순화하기 어려운 복잡한 요인들이 얽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인 자살 동기만을 보도할 경우 결과적으로 잘못된 보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중의 무엇 하나라도 지켜졌다면, 조양 부모가 진 빚 액수나 빚을 지게 된 이유, 의료 기록 같은 것들이 낱낱이 다 까발려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동살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고만 말하기에는 군색합니다. 기자들은 알 권리를 말하지만, 이 중에 무엇이 얼마나 시민의 알 권리와 관련 있을까요. 일반인에 대한 보도가 프라이버시 침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당한 공적 관심사인가‘가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특히 속보를 좇아가는 현장에서는, '정당한 공적 관심사'라는 질문은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YTN 〈뉴스라이더〉 (6월 28일)
YTN 〈뉴스라이더〉 (6월 28일)

왜 하이에나 같은 보도는 계속될까요. 전‧현직 사건 기자 3명에게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첫째는 조회 수 문제였습니다. “지금 당장 먹히는 뉴스 포털에서 타사가 잡아먹는 실시간 점유율을 보면 안달복달이 나서 언론에서 기사를 쏟아내는 구조 같습니다.” 둘째는 사망자든 유족이든 기자에게 쉽게 맞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였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이니 기자가 소송당할 걱정을 안 하는 겁니다.” 셋째, 현장은 통제불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만 안 쓴다고 해서 (취재윤리가) 지켜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넷째,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몰라서였습니다. “사건기자로서 어떤 건 해도 되고, 어떤 건 하면 안 되는지 윤리 가이드라인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달라질 방법은 없을까요? 현장 기자들은 데스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데스크들은 경주마처럼 달리는 기자들이 한 건이라도 더 챙겨오는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스크 윤리교육이 필요합니다.” 경찰의 공보가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경찰 브리핑에서 어떤 건 밝혀도 되고, 어떤 건 밝히면 안 되는지 기준이 제멋대로입니다.” 선정적인 사건 보도가 쏟아질 때 즉시 ‘경보’가 해당 기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자살보도에 대해서는 한국생명존중 희망재단 등에서 1보가 나가면 바로 모니터링하는 메일이 옵니다. 처음에는 이런 메일을 받는 것이 거슬렸지만, 분명히 효과가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극단적 선택’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고 '사망'이라고만 쓰는 변화까지 왔으니까요.”

취재원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궁극적으로 취재 기자들이 취재 대상이 되는 동료 시민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는 문제에 잇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취재 대상인 동료 시민들이 바로 나일 수 있다는 역지사지를 해 보면 취재한 내용 중 무엇을 쓰고 무엇은 보도를 자제해야할지 더 깊게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혼란도 겪을 것입니다. 그 고뇌와 혼란은 무쇠가 불 속에서 단련되는 것처럼 바람직한 보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권력자 앞에서는 작아지면서 힘없는 시민들은 함부로 대한다면, 보이지 않고 목소리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사를 쓰겠다고 했던 기자로서의 초심이 너무 초라해지는 것 아닐는지요.

많은 기자들이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지나친 공격에 상처 입습니다.

그러나 기자가 동료 시민을 어떻게 대하는가 만큼,

동료 시민이 기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입니다.

기자로서 존중받고자 한다면,

기자가 동료 시민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도 그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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