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달콤함은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게끔 만든다. 왕위를 지키기 위해, 혹은 빼앗기 위해서라면 형과 아우 관계는 물론이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 조선왕조를 살펴보더라도 세조는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왕위에 오르고 싶어 하지 않던가.

▲ 사진: 국립극단
국립극단이 선보이는 삼국유사 프로젝트 네 번째 시리즈인 <멸_滅>은 권력을 찬탈한 왕과 그 아들의 관계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풀어간다. 경애왕의 사촌동생인 김부는 쿠데타로 사촌형을 시해하고 왕위를 빼앗는다.

하지만 피로 빼앗은 권력은 자신도 누군가에게 권력을 빼앗길까 늘 초조한 법. 김부, 즉 경순왕의 왕권에 제일 큰 위험인물은 왕위에 오르도록 김부를 도와준 권력자 견훤이 아니다. 바로 김부의 큰아들인 김일이다.

김일은 아버지가 통솔하는 왕실을, 신라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왕조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버지 김부의 왕조를 청산해야 할 왕조로 여기고 김부는 역성혁명을 꿈꾼다. 아들이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큰아들인 김일로부터 발생하기 시작한다.

신라 왕조에서 아버지 김부와 아들인 김일의 이러한 증오의 관계는 후백제 속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 ‘평행이론’으로 펼쳐진다. 후백제의 권력자인 견훤과 그의 아들 역시 김부와 김일의 관계처럼 순탄하지 않은 관계로 처리한다는 건 후백제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글의 서두에서 지적한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부패하는 건 모두 ‘권력’ 때문이다. 아버지가 권력자가 아니라면 김부건 혹은 견훤이건 아들과 이토록 의가 상할 리 만무하기에 그렇다. 권력 앞에서는 아무리 ‘싱싱한’ 부자 관계로도 ‘쉰내 나는’ 부패한 관계로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음을 <멸_滅>은 신랄하리만치 보여준다.

또 하나, 아버지의 왕조를 그토록 부정하며 아버지의 부패한 왕조를 대신하여 역성혁명을 꿈꾸는 김부의 아들 김일이라 하더라도 그 역시 권력 앞에서는 부패할 수밖에 없음을 연극 <멸_滅>은 놓치지 않고 있다.

▲ 사진: 국립극단
제아무리 깨끗한 정치를 일구고자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자 하지만 김일 역시 권력 앞에 놓이자 순수함을 서서히 상실하고 상하기 시작한다는 역설은 권력의 달콤함 뒤에 감춰진 파괴력이 정치적인 순수성보다 강하다는 걸 거침없이 보여주는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썩은 사과를 치우려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썩은 사과가 되고 마는 역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정치 메커니즘의 논리이자, 동시에 제아무리 고결한 사과라도 썩게 만드는 고약한 메커니즘이 바로 정치라는 걸 보여주는 역설을 보여주는 연극이 <멸_滅>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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