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일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확정된 후 당원들에게 인사하는 박근혜 후보 ⓒ연합뉴스

“저의 삶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20일 오후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중에 박근혜가 한 말이다. 대선후보가 된 후 국립묘지 참배, 봉하마을 방문 및 권양숙 여사 면담, 김영삼 전 대통령 방문 등의 행보를 이어나가는 행보와 연결지어 주목해볼만한 발언이다. 사실 지난 7월 10일 타임스퀘어에서 던진 대선후보 출마선언문과 20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낭독한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문은 내용이 많이 겹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선후보 출마선언문에서 던진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와 수락 연설에서 말한 “저의 삶은 대한민국”은 똑같이 1인칭 대명사와 국가가 포함된 표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에는 간극이 있단 점이 흥미롭다. 우리는 여기서 ‘박근혜의 대한민국’을 읽어낼 수 있겠는데, 그것은 그대로 ‘우리의 대한민국’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것이겠다.

'나'라는 주변들을 관통하는 '저'라는 중심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나’는 국민이다. 그녀는 출마선언문과 수락 연설문 두 군데에서 모두 앞으로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의 행복을 중시하겠다는 선언이 있다. 과거엔 국가의 발전이 곧바로 국민의 행복으로 이어졌으나 이제는 그 연결고리가 끊겼으니 국민 개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정책기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가계소득과 일자리 문제에 전전긍긍하는 ‘미국적 보수의 상식’에 맞춰가는 기조로 평가할 수 있다. 아마도 이 ‘국가에서 국민으로’라는 슬로건은 수출대기업의 실적을 우선시하여 그에 맞춰 금리 및 환율정책을 구상하던 과거 보수의 방식과 박근혜를 구별짓는 ‘박근혜식 경제민주화 담론’의 핵심일 것이다.

반면 “저의 삶은 대한민국”에서 ‘저’는 명백하게 박근혜 자신이다. 박근혜 본인이 자신의 삶의 궤적이 대한민국을 표상한다 주장한다. 즉 박근혜의 통치기조는 이 ‘저’에서부터 각각의 ‘나’들로의 확장이다. 그녀는 수락 연설문에서 “100% 대한민국”이란 수사를 내걸었다. “이념과 계층, 지역과 세대를 넘어,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모두가 함께 가는 국민 대통합의 길”을 가겠다 했다. 즉 ‘저’에서 ‘나’에서의 확장을, 배제없이 이루어 내겠지만 그 중심에 있는 대한민국적 가치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그것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가장 즉각적으로 나올 수 있는 대답은 물론 그녀의 아버지가 추구했던 산업화의 가치일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박근혜가 거듭 강조하고 있는 ‘국민’들의 그녀에 대한 사랑을 거론해볼 수 있다. 그녀는 위기 때마다 국민들의 사랑이 그녀를 구해내고 이끌어냈다고 강조하니까. 그런데 이렇게만 규정한다면 아무런 정치적 내용을 없다. 그러니 조금만 더 엮어보자. “산업화의 가치를 계승하는 이가, 다른 가치를 대변하는 이들을 포섭하며 통합을 이루는 것” 민주화 이후 혹은 최근 대선후보 수락 이후 그녀의 행보를 떠올린다면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야권, 따라가기도 애매하고 거부하기도 위험한

결국 그녀의 아버지가 일구어낸 산업화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다른 가치의 통합, 이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국민 대통합일 것이다. 그녀의 생각에, 아버지가 추구했던 것은 산업화였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악’들은 본의가 아니며 불가피한 행동의 결과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사과’는 할 수 있다. 김대중에게도 사과하고, 장준하 선생의 유가족에게도 사과했듯이 말이다. 물론 인혁당 피해자들은 살짝 건너뛰지만, 사과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덕담을 들은 걸 보면 사과하는 기술이 아주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것이 그녀가 “100% 대한민국”을 만드는 방식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신을 국민대통합의 적임자라 말했다는 박근혜의 강조도 이런 인식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박근혜의 ‘100% 대한민국’을 비판하는 방법으론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물론 여러 가지 방법들이 가능하다. 먼저 박근혜가 산업화의 주역으로 ‘아버지’를 긍정하는 방식은 군부독재 비판자들의 논리와 모순되기 때문에 아무리 사과를 해봤자 ‘100% 대한민국’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대한민국이 산업화란 과제를 이룩했음을 긍정하더라도 그것을 ‘박정희’란 상징으로 환원하는 데엔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장 타협적인 방책으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에 동의하더라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박근혜의 대한민국’에 대한 대응방법의 고민은 선거전략의 문제에서부터 ‘공화국 대한민국’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에까지 걸쳐 있다. 가령 박근혜가 봉하마을에 온다고 할 때 야권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또 박근혜가 모든 전직 대통령에게 참배를 한다면, 야권 후보 역시 이승만과 박정희에게도 참배를 해야 할까? 이 문제에 있어 박근혜의 방식을 따라간다면 개혁세력 지지자들의 역사의식에 위배될 수 있다. 반면 따라가지 않는다면 중도파 유권자들에게 편협하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이 딜레마는 앞서 시사했듯이 선거전략의 문제를 넘어선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엄격하게 따진다면 독재정권에서 배양되고 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과 공화국을 만들어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87년 체제의 타협적 결과에 의해, 우리는 바로 그 사람들과의 협상을 통해 정치적 합의를 도출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말하자면 박정희의 독재가 산업화에 공로를 세웠다고 믿는 이들이 유권자의 1/3이 넘을 경우 그 대변자인 박근혜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다. 박근혜는 죽은 사람들에게 참배하며 이 문제를 손쉽게 건너뛰지만, 우리는 엄연히 살아 움직이는 박정희의 딸을 상대해야 한다.

'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두 가지 방법

실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해결책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우리는 박정희와 전두환의 대한민국을 인정할 수 없지만, 중도파 유권자들은 그런 주제에 관심이 없는 만큼, 이 문제에 대한 토의는 생략하고 사회경제 정책에서 경쟁하여 새누리당과 박근혜를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박정희를 산업화의 상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나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섣부른 화해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견해 모두 이 방책으로 수렴된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엔 전혀 상이한 역사관을 가진 두 당파가 서로를 긍정하지 않은채 사회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경쟁하는 상황이 된다.

이는 주로 요즈음의 정치평론가들이 요구하는 방책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될 경우 가령 박근혜가 봉하마을을 참배하며 이쪽 진영에도 무언가를 압박할 경우 아까 말했던 딜레마가 다시 돌아온다. 또 양 당파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제약을 하지 않는 이러한 상황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너무나도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는 일종의 ‘도박’을 전제한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규율이 없기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지지자들의 역사의식을 전적으로 만족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박근혜로 표상되는 반대당파와 적극적으로 타협하여 어떤 최소한의 선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의 정치실정에서 가능한 것으로는, 박정희의 공로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면서도 시민을 직접적으로 학살한 전두환에 대해선 ‘공화국의 역사’에서 배제하는 식의 타협안이 가능할 것이다. 사실 이런 타협책 역시 민주공화국의 질서를 위해선 최소한의 배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100% 대한민국’이란 조어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드러낸다. 홍세화 식으로 정리한다면 '똘레랑스를 논하기 위해선 앵똘레랑스의 경계가 설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의 등장이 강요한 어떤 문제의 대면

이런 타협이 이루어진다면 ‘대한민국’의 정치적 질서 안에 최소한의 기준을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지금처럼 양대 당파가 비리는 안 되고 막말은 안 된다 정도의 도덕률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합의하지 못하는 상황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야권 내부에서조차 이러한 타협적 역사인식을 합의로 이끌어내기가 어려울 거라는 점이다. 아마 박근혜와 같은 이가 대통령 후보로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받지 않은 채 그저 ‘미래’를 호출하며 기준도 계통도 없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딸’이 유력 대권후보로 정말로 링에 올라와버린 현실은 이런 문제에 대한 진보개혁 성향 유권자들의 성찰을 요구한다. 어쩌면 우리가 ‘대선후보 박근혜’에 불편해한 건 어떤 종류의 윤리적 원칙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이러한 성찰을 회피하고 싶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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