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주가 어떤 방법으로 김상중을 처리하느냐는 처음부터 초미의 관심사였다. 드라마틱한 해결은 역시나 손현주가 직접 김상중을 살해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많은 시청자들이 내심 바랐던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다소 당황스러울 정도로 계몽의 방법을 택했다. 결국 손현주는 아버지의 이름보다 정의의 이름에 섰다.

그렇다고 억지라고 할 수는 없다. 법정살인과 탈옥범에 불과할 수도 있었던 손현주를 도운 여러 사람이 있었고, 손현주의 억울함은 사적인 경계를 벗어나 사회구조의 문제로 심화됐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 남편의 이름으로 김상중 뒤에 섰다면 간단히 총 한 방으로 끝내버릴 수 있었고, 손현주의 감정은 그쪽을 강렬하게 원했을 것이다. 계속 혼자였다면 분명 그렇게 기나긴 추격을 끝마쳤을 것이다.

추적자는 스톡홀름 신드롬이 걱정되는 드라마였다. 워낙 박근형과 김상중의 연기가 좋았던 것도 있지만 한동안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이들이 가진 힘과 권위에 자신도 몰래 동조되었다. 머리로는 분명 두 사람이 악의 축인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그들의 논리에 수긍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손현주가 절대로 김상중을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도 그만큼 커져만 갔다. 그래서 결국 유일한 해결은 저격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는 없었다.

아마도 이런 현상 때문에라도 작가는 계몽의 해결방식을 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손현주가 강동윤을 죽여 버리면 훨씬 더 감정적으로 후련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끌어왔던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는 포기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누구냐는 불만을 갖게 할 정도로 작가는 진짜 공공의 적이 누구인지에 대해 골몰했었다. 이발소에서 강동윤을 죽이면 그것은 단지 손현주의 사적 복수에 그치지만 몰래카메라를 이용해 김상중이 범행사실을 스스로 인정케 함으로써 더 큰 그림을 완성했다.

출구조사 70%에 육박하는 지지율은 거꾸로 선거의 긴장감을 떨어뜨렸고 그 결과 저조한 투표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몰래카메라를 본 국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투표로써 김상중의 당선을 저지하러 나선 것이다. 몰래카메라까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주에 있었지만 투표폭탄은 생각지 못한 허를 찌른 전개였다.

사실 김상중의 몰래 카메라를 보고 갑자기 전 국민이 나서서 투표를 하러가게 되고, 그로써 김상중의 당선을 막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그다지 가능성이 높은 결과는 아니다. 또한 연장 1회를 포함해 3회가 남았다는 점에서도 투표를 통해 김상중을 심판하는 것은 성공보다 실패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이런 전개를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해졌다. 누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떤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은 확실히 말한 것 아닌가 싶다. 그것이 현실의 누구라고는 굳이 짐작할 필요도 없다. 모르면 바보일 뿐이다. 다만 아직 반전의 여지는 남았다. 그것이 김상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아니면 박근형이 개입하는 반전인지를 아직 모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시민들이 나선 투표혁명은 아직 결과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방심은 금물이다. 그래도 투표가 결국 세상을 바꿀 유일한 힘이자 희망이라는 공감을 끌어낸 것은 가슴 뭉클하게 했다. 여기서 다시 또 다른 반전이 오게 될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패배가 아니라 싸움의 계속일 수 있다. 작가는 해피엔딩을 통한 감정적 위안보다는 현실을 바라보는 긴장감을 한 뻠이라도 더 당기기를 원하는 것 같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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