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가득 찬 한 시간이었다. 시청하는 내내 손과 발이 떨리고, 심장은 뼈와 살을 뚫고 나올 기세로 쿵쾅거렸다. 감정 몰입이 지나치다는 것을 알고 ‘이것은 드라마다’를 외쳐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다. 드라마는 분명 허구의 장치이다. 그렇지만 추적자를 보면서 누가 허구를 주장할 수 있을까?

아직 스무 번도 채우지 못한 생일날. 한 소녀가 친구들과의 작은 생일파티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차에 치였다. 교통사고는 흔치는 않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이다. 그렇지만 사고를 낸 운전자가 피해자를 두 번 더 차로 깔아버리는 살인행위는 누구에게도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다.

그런데 이 어린 소녀에게는 계속해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심지어 이미 세상을 뜨고 난 후에도 말이다. 억울한 죽음에 애도와 추모만으로도 부족할 판에 가해자를 지키기 위해, 아니 권력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가해자들은 잔혹한 거짓과 조작으로 어린 소녀의 명예마저 유린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법정에서 숨진 피해 소녀와 같은 또래의 소녀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그저 인기가수의 팬인 소녀들에게 오직 관심은 사랑하는 오빠만 보일 뿐이다. 맹목적인 팬심은 정의의 또 다른 적이다.

이 엄청난 조작사건의 철면피한 배후조정자 김상중은 빨리 가해자를 무죄 방면시키라는 장인의 독촉에 떠밀려 현직 대법관에게 사직을 강요한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차기 국무총리자리를 약속한다. 그 말에 대법관이라는 자리를 훌훌 털고 법정에 나선 변호인은 판사의 엄청나게 편파적인 조정에 힘입어 사건을 일사천리로 풀어간다. 소위 전관예우의 폐해를 목격하게 된다. 전관예우는 관례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범법행위에 불과하다.

일반 판사도 아니고 대법관이었던 변호사의 전관예우는 엄청났다. 영화 부러진 화살보다 오히려 더 심한 부분들도 보였다. 폭우로 도로가 파여 덜컹거렸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서 뺑소니가 아니라는 궤변이 통했고, 소년원에 복역 중인 피해소녀의 친구를 회유해 중학교 시절부터 마약과 원조교제를 했다는 거짓 증언을 끌어냈다.

이제 더 이상 이 사건의 법정은 진실을 가리는 자리가 아니라 권력과 욕망이 난잡하게 뒤엉켜서 이미 죽은 소녀를 다시 한 번 더 죽이는 또 다른 살인의 현장이 됐다. 결국 가해자인 인기가수는 병보석으로 풀려나 휠체어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고, 뺑소니친 범인을 잡은 아버지 손현주는 동분서주하며 딸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하지만 이미 진실은 권력의 완강한 벽에 막혀 버렸다.

국과수의 부검은 이 소녀의 진짜 살인을 숨겨버림과 동시에 불명예의 꼬리표를 달아주는 데 부역했을 뿐이다. 다량의 마약성분을 검출한 국과수는 그것이 치사량임을 감췄을 것이다. 물론 마약중독으로 몰아가기 위한 변호사의 시나리오에 입각한 조작이다. 심지어 경찰 선후배 사이의 도움조차 증인매수로 매도해버려도 이미 기울어진 법정을 바로세울 수는 없었다. 손현주가 법정에 총을 가져간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억울한 아버지 손현주가 이 모든 악행의 조정자 김상중에게 하소연하며 도움을 간청하게 된다는 점이다. 김상중은 가증스럽게도 인자한 표정으로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손현주를 위로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김상중은 가해자에게 사소한 찰과상을 입힌 손현주를 처리하기 위해서 가짜 진단서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이쯤 되면 분노보다 환멸이 더 커질 수도 있다. 욕망에 중독된 우리는 이미 분노를 다 팔아치웠다. 분노하는 법을 스스로 거세한 사람은 분노할 지점에서 쉽게 환멸로 갈아타게 된다. 분노하면 싸울 수 있지만, 환멸은 외면하고 포기하게 한다.

추적자는 시청자에게 분노와 환멸의 두 가지 선택을 제시하고 있다. 드라마 상황은 그 경계의 아주 좁은 외나무다리에 시청자를 세우고 있다. 분노하라는 선동보다 더 가혹한 단련을 요구한다. 흔들리지 말아야겠다. 분노는 권력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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