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언니, 은희를 봤어. 우리 은희, 라는 전화 연락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내 이야기인 줄 알았다. 후배가 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영화 이야기인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대화를 주고받는 중에도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나의 그 시절과 너무나 닮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대화가 오고 가면서 영화 이야기이고 주인공 이름이 은희,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은희에 대해 알게 된 순간이었고 또 다른 은희의 그 시절이 나의 그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에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덜컹거렸다. 전화를 끊고 영화를 찾아보았다. 나는 당연히 영화 제목이 ‘은희’일 것으로 생각하고 검색을 했는데 <벌새>였다. 왜 은희가 아니라 벌새일까 생각하다 벌새에 관해 인터넷 사전을 찾아보았다. 벌새는 1초에 19번에서 90번 날갯짓을 하는 새로, 다 자라도 몸길이가 불과 5㎝밖에 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였다.

영화 <벌새> 스틸 이미지

나는 어쩔 수 없는 이끌림에 영화 예매를 하고 혼자 영화관을 찾았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열네 살의 은희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화면 안에 나의 그 시절이 있었다.

나도 1남 2녀 중 막내였고, 중산층 가정에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 모든 기대와 희망을 안고 있는 오직 단 하나뿐인 오빠, 그냥 언니, 그리고 나. 가끔 마땅치 않은 것이 있으면 폭력을 행사하던 오빠까지 모두 내 그 시절과 같았다. 어느 날은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어느 날은 애처로워 눈물을 쏟았던 시절이었다. 하늘로 날아올라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수천 번 날갯짓하고, 부딪치고, 울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 날갯짓하며 열네 살을 통과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보편적 은희였다.

영화와 다른 것이 있다면 나에겐 영지 같은 어른이 없었단 점이다.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 ‘응 많아. 아주 많아. 자기를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아. 나는 내가 싫어질 때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 아, 이런 마음들이 있구나'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곁에 없었다. 혼자 감내하고 혼자 바둥거리며 열네 살 세계를 통과했다. 영화가 끝나고 내내 온 힘을 다해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먹먹했다.

영화 <벌새> 스틸 이미지

벌새 한 마리가 가슴에 날아들어 쉼 없이 날갯짓하고 바람을 일으켰다. 1994년에 나, 은희는 열네 살이 아니고 스물두 살이었다. 80년대 질곡의 십 대를 건너와 이십 대가 되었고, 세상은 변했다고 생각했다. 됐다고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다고, 똑같은 교실에서 똑같은 것만 집어넣는 일은 됐다고 노래하는 서태지 음악을 들었고, 이제 그만 그런 세상은 변해 1994년 열네 살 은희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다. 우리의 보편적 은희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어느 시대로 옮겨 놓아도 나 혹은 너의 이야기 될 수 있는 은희가 있다는 사실이 바늘에 손끝이 찔려 맺힌 피처럼 선명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은희가 나에게 묻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어떻게 잘 지냈어? 너는 어떤 어른이 되었어?

우리의 수많은 은희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1994년 열네 살이었던 은희는 2022년 사십 대의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나도 그 수많은 은희 중 한 명이다. 나, 은희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어른이 되었고, 작은 일에 분개하고 작은 일에 좌절하지만 다시 일어나 살아가고, 감사하며 먼저 인사하려고 노력하는 어른이 되었다. 전부는 아니어도 되도록 옳게 살아가려는 어른이 되려고 아직 노력 중이다.

영화 <벌새> 스틸 이미지

2022년 지구 어디에선가 또 다른 보편적 은희가 세상을 향해 날갯짓하고 있을 것이다.

십 대를 관통해 세계로 나가 어른이 되기 위해 작은 날개로 1초에 90번의 날갯짓을 하며 혼란과 편견을 이겨내고 있는 은희, 이 넓은 우주에서 너의 별을 찾아 너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우리의 수많은 은희,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스러운 은희, 당신의 길을 언제나 응원합니다. 수많은 은희에게 영화 ‘벌새’에서 영지 선생님이 남긴 편지를 보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영지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

김은희, 소설가이며 동화작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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