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과 또 살인 그리고 구사일생의 회복. 6회까지의 적도의 남자는 어둡고 우울하기만 했다. 비록 꽃같은 악역 장일이 있었다지만 여성 시청자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많이 무거웠다. 그래서 엄태웅을 비롯해서 모든 배우들의 뛰어난 배역 소화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더디게 오를 뿐이었다. 그런 적도의 남자에게 총선 투표가 있는 11일은 어쩌면 유일한 반등 기회였다.

타방송사들은 개표방송으로 드라마는 모두 결방하는 데 반해 적도의 남자만 차질 없이 방영되기 때문이다. 그런 전략 때문인지 7회는 선우와 지원을 위한 로맨틱 분위기를 야간공습처럼 쏟아냈다. 한 회에 한 번의 명장면만도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버거운데 7회에는 숨 쉴 틈 없이 로맨스가 이어졌다. 비록 키스신은 없었지만 그 이상의 설렘과 달콤함을 주었고 그것은 곧바로 시청률로 이어졌다.

연주회장에서 길이 막혀 늦은 지원이 아무 탈이 없음을 알고 버럭 껴안을 때에는 깜짝 놀랄 박력이 있었고, 이후 작은 홀에서 지원이 피아노를 치자 선우가 다가가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풋풋하고도 애틋했다. 그리고 다시 공원으로 가서 커플 자전거를 탈 때까지 이어진 둘의 노래는 사랑이 모든 것을 다 잃은 선우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표현해주었다. 노래는 김동규의 ‘시월 어느 멋진 날에’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예고에 불과했다. 그 장면만 따로 떼어서 ‘어둠 속에서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소제목을 붙여도 좋을 정도로 소박하면서도 아주 근사한 러브신이 이어졌다.

마침내 방을 구해 이사한 방으로 지원이 휴지랑 세제를 들고 찾아왔다. 초라한 방벽에 등을 대고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선우는 뭔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지원에게 노인과 바다를 읽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전기가 나갔다. 시각장애인 선우에게는 마찬가지지만 지원에게 불이 나간 상황은 할 것이 없다. 지원이 어색하게 “그럼 이제 뭐하죠?”하자 선우는 “난 어둠 속에 책 읽는 남자잖아요”하면서 입을 연다.

책을 읽는다면서 선우는 슬그머니 고백을 하고 만다. 물론 앞에 몇 구절은 한용운의 시 해당화가 맞다. 그러나 “너에게 이 시를 보낸다”며 자기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영문과 전공이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지만 분위기상 모르는 것이 더 낫다.

그렇지만 “네 옆에 있는 게 행복하고, 네 옆에 있는데 두려운 나는 너를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부분은 딱히 시가 아닐 수 없는 고백이었다. 그리고 이별에 대한 슬픈 각오도 읽혀진다.

선우는 지원을 좋아하지만 쉽게 고백할 수 없다. 장일에게도 “좋은 사람 같은데 맹인남자친구를 갖게 할 수는 없잖아”라고 그런 뜻을 말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우는 마치 어떤 책을 읽는 것처럼 자기 마음을 지원에게 고백한 것이었다. 그런 선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원은 아주 좋다며 그 부분에 하트 스티커를 여러 개 붙여주었다. 마치 선우의 마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참 기가 막힌 묘사였다. 누구는 사탕키스, 거품키스 이런 것들을 좋아하겠지만 또 누구는 이렇게 아주 깊은 마음으로 조심스레 다가가는 모습에 더 숨 막힐 듯 좋아한다. 좋은 사람한테 맹인 남자친구를 갖게 할 수 없다는 선우의 마음을 한용운의 시만큼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해당화라는 시에도 자신을 한껏 낮춘 조심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원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한편 선우의 주변에서는 또 다른 음모가 진행되고 있으며 또한 아버지를 자청하는 문태주의 도움도 임박해있다. 그것은 모두 선우에게는 혼란이겠지만 다른 때와 달리 지원이 있어 다행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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