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망설임 끝에 인하는 마침내 자기 마음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 정도로 도저히 견디지 못할 열망. 그 열망으로 인해 스스로 타 죽어버릴 듯한 사랑. 그쯤은 되어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들에게는 너무 늦은 고백이었던 것도 피할 수 없는 아픔이기도 했다.

윤희에게 드디어 입을 뗀 인하는 그 둘이 선 아름다운 풍경과 쏙 어울리는 고백을 했다. 하도 아름다워서 한 번 들었을 뿐인데도 단번에 외워질 정도였다.

“내 말 그냥 들어만 줄래요? 다 거짓말이었어요. 내 그림, 윤희 씨가 우연히 내 그림 속 풍경에 들어온 게 아니라 그날 윤희 씨가 내 풍경이었어요. 처음 만난 날부터 내 풍경은 쭉 당신이었어요. 그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것 때문에 난 항상 설레었어요. 고마웠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비겁했던 거... 미안해요. 너무 늦어서”

이 정도 고백이면 시 한 편이나 다름없다. 또 그때에는 이 정도의 시심은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딱히 말로 근사하게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숱한 날 혼자서 상대에게 한 말을 하고 또 했을 테니, 이 만큼의 근사한 고백은 오랜 마음 졸임에 대한 훈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랑이란 것을 마음에 오래 담아두다 보면 어느새 한숨이 되고, 그 한숨은 다시 시가 되는 법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휘휘 돌아가게 만든 다리처럼 인하와 윤희는 참 먼 길을 돌아 겨우 서로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곳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인하의 입대가 예정되어 있어 그들은 묵혀왔던 사랑을 나눌 시간이 충분치 않다. 그렇게 또 애를 먹이고, 속을 태웠던 것도 이 바보 같은 사랑의 피할 길 없는 행보일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일단 사랑이 확인된 후에는 여자는 용감해진다. 그리고 운도 따라준다. 윤희는 인하를 찾아 춘천까지 간다. 그러나 혼자서라도 러브스토리를 보러 먼저 떠난 인하와 길이 엇갈리고 만다. 하릴없이 춘천 시내로 나온 윤희는 러브스토리 간판이 내걸린 극장을 발견하고 발길을 옮긴다. 그러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고 마침 영화가 끝났는지 극장문을 밀치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서로를 발견하고 놀란다.

기쁜 마음으로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 춘천역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막차마저 떠난 후. 당황스러운 그들에게 역 근처 민박이나 여인숙쯤을 운영하는 아주머니가 접근해 자고가라고 유혹한다. 보통은 그렇게 치명적인 추억의 역사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지극히 순수해 손 한 번 잡는 것도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포기하고 마는 인하였기에 유혹을 뿌리치고 동해안으로 가는 심야열차에 오른다.

바깥이 온통 암흑인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은 이 진부한 드라마가 아니면 주지 못할 깜짝 놀랄 선물을 주었다. 인하는 먼저 차창에 뭔가를 끄적거리더니 윤희보고 입김을 호오 불라는 시늉을 한다. 거기에는 “행복해요?”라고 쓰여 있다. 윤희는 다시 한 번 입김을 불고는 물음표 뒤에 느낌표를 더해서 그들의 질문과 답을 완성했다. 그 둘이 만든 낭만동화는 마치 시청자를 향해 거는 수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텅 빈 동해바다에 나란히 앉아 그들은 그림보다,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바다를 마주보며 그들은 볼에 가볍게 키스하는 행복까지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행복은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러브스토리의 내용이 그렇듯이, 많은 사람이 진부하다고 손가락질 하듯이 윤희에게는 몹쓸 병이 있을 것 같다. 진짜 아픈 사랑은 긴 세월을 함께한 후의 이별이 아니라 제대로 뭔가 하지도 못하고 맞는 이별이다.

그렇지만 윤희는 그 일을 알리지 않고 대신 인하가 감추고 있던 다이어리를 핑계 삼아 떠나게 될 듯하다. 그리고는 2012년의 전혀 다른 서준과 정하나로 다시 등장할 거라 예상된다. 서준과 정하나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장근석과 소녀시대 윤아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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