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의 남자는 동시간대 경쟁 드라마들과 크게 다르다. 더킹 투하츠와 옥탑방 왕세자 모두가 로맨틱 코미디라는 요즘 트렌드에 밀착하고 있는 반면 적도의 남자는 나홀로 진지하고 비장하다. 이렇게 비장한 드라마가 로코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몰입도를 얼마나 높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비록 이승기, 하지원, 박유천, 한지민 등 엄청난 스타파워에 눌려 초반 시청률이 부진하기는 하지만 작품성이나 연기력에서는 호평을 유지하고 있어 반등의 여지는 항상 열려 있다. 지금까지 이현우, 임시완 두 아역이 아주 힘차게 초반을 이끌어주었다. 특히 아주 여린 선을 가진 이현우의 엄포스 못지않은 열연은 또 다시 “죽어도 못 보내”를 토로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엄포스 엄태웅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역들이 짧지만 강렬한 모습을 보이는 동안에도 아무도 ‘아역의 저주’를 말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배우가 엄태웅이기 때문이었다. 엄태웅은 그런 시청자의 기대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오랜 의식불명상태에서 깨어난 엄태웅은 앞을 보지 못했다. 의식을 잃을 당시 후두엽(뒷통수)를 세게 가격당한 충격으로 생길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코마상태가 지속되면 예기치 않은 후유증이 올 수 있음은 의학드라마를 통해서 익히 들어본 사실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많은 기억들을 과거에 그대로 둔 채였다. 당장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선우는 미칠 듯이 반응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우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 대신에 “어두워, 불 켜!‘라는 말을 반복했다. 자신의 실명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 적도의 남자 김진영 작가에게 자꾸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은 이처럼 허투루 흘려보낼 대사가 없다는 점이다. 그냥 흘려버릴 만한 대목에도 뭔가 상징이 있고,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런 인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장일과 수미도 마찬가지다. 선우가 바닷가에서 발견되어 병원에 옮겨진 상황에서 장일은 수사관이 자신을 찾았을 때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반응을 연습한다. 그런가 하면 선우를 해친 것이 장일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입을 막아버리는 수미의 태도는 장일보다 더 복잡하고도 악마적인 심리를 읽을 수 있다.

그런 반면 의식불명 속 선우는 아버지와 아지트에서 고기를 구어 먹으며 단란했던 한때의 기억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기억. 의식불명 상태의 선우가 더욱 처절해 보이는 회상이었다. 선우의 무의식은 반드시 살아나겠다는 참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미친 듯이 불을 키라고 외치는 절규에는 아직 기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치밀어오는 복수에 대한 열망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복도에서 한 남자를 부둥켜안고 도와달라고 사정을 하는데, 그 남자는 바로 자신을 해친 친구 이장일이다. 그저 극적으로 보이기 위한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물에 빠지는 무의식 속에서도 분노 대신 슬픔을 느꼈던 선한 선우가 장일에 대한 궁극의 자세가 복선으로 담겨진 것도 같았다.

그렇게 선우의 실명 상태를 위해 엄태웅이 참 많이 연구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눈은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눈동자 상태를 치밀하게 연구하고 또 연습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 디테일을 표현하는 정도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세밀하고 철두철미했다. 그러기 위해서 아마도 엄태웅은 눈을 뜨고도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스스로의 마인트 콘트롤을 한 것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는 척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엄태웅은 마치 눈동자를 사시처럼 모으거나 분산했다. 실제로 해보면 알겠지만 그 상태에서 대사와 감정을 놓치지 않고 살려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몸과 감정을 따로 따로 조절해야 가능한 연기인데, 아주 많이 연습했거나 아니면 천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적인 취향에 따라 갈릴 수도 있는 평가겠지만 적도의 남자는 가벼움을 저어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드라마이다. 작가와 연출 그리고 배우들까지 드라마 한 편을 수준 높게 완성시키기에 손색이 없다. 특히나 소름주의보를 발령하며 돌아온 엄포스의 등장으로 적도의 남자가 수목극 꼴찌라는 생각은 보류되어야 할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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